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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명함을 잠시 내려놓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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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도쿄 총국장

나는 어둠의 공포를 안다. 3년 전 3월 11일.

 출장지였던 일본 도호쿠(東北) 아키타(秋田)에서 대지진을 맞았다. 모든 전기와 통신이 차단됐다. 밤이 되자 아키타는 암흑으로 변했다. 호텔 방 안의 화장실을 가는 데 몇 분이 걸렸다. 언제 암흑이 걷힐지 모르는 게 더 큰 공포였다.

 지금 세월호에 갇혀 있는 어린 학생들이 겪었을, 아니 겪고 있을 암흑의 공포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제자리에 있으라”는 무책임한 어른 말을 곧이곧대로 착하게 들은 것도 죄인가. 말 잘 들으면 죽고, 말 안 들으면 사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던가.

 TV에 비친 구조 보트를 향한 아이들의 점프는 슬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여섯 살 오빠가 벗어준 구명조끼를 입고 이름 모를 학생들에 의해 구조된 다섯 살 지연이. 병원에서 쏟아낸 지연이의 눈물은 우리 국민 모두의 피눈물이다. 후진국형 사고에 국민은 치욕감을 느낀다.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독하게 다짐했던 안전에 대한 맹세는 ‘말로만’이었다.

 우리 모두 선진국 명함을 잠시 내려놓자.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경제규모가 커졌다 해도 국민 생명이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를 누가 자신 있게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안전 선진국’ 일본의 두 사례는 우리의 나아가야 할 길을 시사한다.

 먼저 시스템. 일본은 1998년 총리 직속으로 위기관리감이란 자리를 만들었다. 모든 안전 관련 사고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최고의 프로들이 이 밑에 대거 포진한다. 자연재해는 물론 세월호 사고와 같은 해난사고 등 20개의 종류별 상세 매뉴얼이 존재한다. 사고 1보가 접수되자마자 경찰·자위대·지자체를 잇는 지휘체계, 언론 대응, 피해자 가족 지원 등 모든 게 물 흐르듯 이뤄진다. 세월호 사고처럼 실종자 수가 반나절 만에 뒤바뀌고, 해경 따로 안전행정부 따로 우왕좌왕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대통령이 즉석 지시를 내리니 2시간 만에 현지 중계 장치가 설치되는 코미디 같은 일도 없다.

 또 하나는 의식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키는, 쉽게 말하면 선진 국민의 자세다.

 2009년 11월 13일 도쿄만을 떠나 오키나와로 향하던 대형 여객선 ‘아리아케’는 항해 도중 좌초해 90도로 기울었다. 이번에 사고를 일으킨 ‘세월호’를 일본에서 운영했던 회사 소속 배였다. 8m의 높은 파고 속에서 20명의 승무원은 구조선에 승객을 다 넘긴 뒤에도 배 안을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선장과 승무원 7명은 서로 “우린 괜찮다”를 함께 외치며 바다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이들은 전원 구조됐다. 항구에 도착한 선장 마쓰모토(당시 49세)의 첫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아리아케’를 끝까지 지키지 못해 너무나 억울하다. 하지만 우리는 승객을 구했다. 그러면 됐다.”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해내자. 우리 아이들에게 더 이상 암흑의 공포를 경험시켜서야 되겠는가.

김현기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