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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통일시대 준비와 독일 통일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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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오늘 같이 좋은 날,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그것이 영원히 지나가지 않았으면 해…그렇게 기쁘게 기대했던 오늘 같은 날…’. 독일 사람들이 즐거울 때 누구나 함께 부르는 노래 가사의 일부다. 전후 이 노래가 정치적 사건으로 독일에 울려 퍼진 것은 단 두 번. 모두 통일과 관련된 사건을 통해서였다.

 1972년 4월 28일. 이 노래가 대학의 학생식당을 중심으로 처음 울려 퍼졌다. 브란트 정권에 대한 불신임안이 부결된 직후였다. 통일로 가는 첫 관문인 동방정책이 탄력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노동자 계급 출신, 사생아,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에 망명한 경력의 브란트 총리. 그는 ‘더욱 민주주의를’이란 슬로건 아래 내정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동방정책(Ostpolitik)을 통해 동독에 민주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보수야당인 기민당의 반대가 극심했다. 동방정책이 독일의 분열을 영구화할 뿐만 아니라, 재통일의 기회마저 막을 수 있다며 불신임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야당이 한 표 많은 상황. 하지만 투표 결과는 부결. ‘오늘같이 좋은 날, 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로부터 17년. 1989년 11월 9일, 이 노래가 독일 전국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밤이었다. 이번에는 진보적인 지식인과 학생들까지 보수적인 콜 정권을 위해 이 노래를 불렀다. 국회에서는 녹색당 의원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애국가를 합창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결코 단 하룻밤의 해프닝이 아니었다. 녹색당 여성 의원이 중얼거렸다. ‘정말 장난 아니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이를 들은 슈피겔지(誌)의 기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천안함 사건에서 무인기 사건에 이르기까지 남남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다. 한국에 유학했던 독일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체감적으로 느끼는 독일과 한국의 차이가 무엇 같으냐고.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정치의 차이 같다고 했다. 승자 독식의 한국정치와 합의제적 독일정치. 그는 통일시대 준비가 이전처럼 양극화로 치닫지 않을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독일 정치제도는 특이한 발명품 중의 하나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권력을 공유하고, 합의를 강제하며, 자의적인 행정결정을 억제하도록 권력을 분산시키면서도, 정권 교체를 어렵게 하는’ 정치제도인 것이다. 이런 제도 덕분에 독일에서는 우리와 같은 제왕적 권력 행사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분권적 권력구조로의 개헌을 먼저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고처럼 들린다.

  정치적 리더십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동방정책을 들고 나온 브란트, 권력 상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나토의 ‘이중결정’(소련이 동구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한 데 대항하여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하면서 소련과 전략미사일 제한 교섭을 시도한 전략방침)을 결단한 슈미트,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신뢰감을 주는 자세로’ 일관한 콜 총리. 이들은 서로 이념은 달랐지만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에 충실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분단 상황. 하지만 이들은 될 수 있는 한 통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통일을 둘러싼 이념 논쟁과 이웃 국가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으로는 합의의 정치를, 밖으로는 유럽과의 일체화에 올인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모색했던 것이다. 통일준비가 이념논쟁은 물론 주변국들의 불신을 야기시켰던 우리에게 주는 시사가 적지 않다.

 17년간 최장수 정권을 이끌며 통일을 실현시킨 보수 정치가 헬무트 콜. 그는 거대한 비전에 매달리기보다는 이용 가능한 수단을 십분 활용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안으로는 신뢰를, 그리고 밖으로는 공세적 정책의 자제에 철저했다.

 물론 우리와 독일의 정치 풍토는 다르다. 역사와의 관계는 물론 지정학적 위상도 다르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이 전쟁 없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치제도와 정치의 산물이라는 데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다.

 통일시대 준비위원회가 곧 윤곽을 드러낼 모양이다. 독일처럼 진보세력이 보수정권을 위해 찬가를 불러줄 수 있는 날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진보세력의 여성 의원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 하고 중얼거릴 수 있도록 말이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