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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절망 떨치고 … 날자, 날자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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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집(isang.or.kr) ‘이상의 집’은 이상의 문학적 거점인 서울 통인동 생가 터에 지어졌다. 보수 공사를 마치고 지난달 재개관했다. 이상의 집에서는 이상의 생일(9월 23일)과 기일(4월 17일)에 문화행사가 진행된다. 다른 공연과 문학 강연은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일정은 홈페이지에 공지된다. 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시, 오후 2~6시. 설·추석 연휴 휴관. 무료 입장.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070-8837-8374.

‘박제가 돼버린 천재’ 이상(李箱·1910~37)은 한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28년의 짧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이상의 삶과 문학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그를 기념할 만한 공간인 ‘이상의 집’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다. 이상이 20년간 살았던 집터에 지은 문화공간이다. 최근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한 이상의 집을 찾았다. 이상의 기일인 4월 17일을 앞두고서였다.

글=양보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의 집’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에 있다. 이상이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20년간 살았던 집터 일부에 들어선 10평 남짓의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다. 2010년 개관했지만 한옥이 워낙 오래된 탓에 꼬박 1년 보수공사를 했다. 공사를 마치고 지난달 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집 벽과 지붕은 옛집 그대로 유지했다. 대신 입구는 밖에서 안을 구경할 수 있도록 커다란 창을 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이상 관련 서적을 읽거나 『이상전집』(태성사·1956) 초판을 구경할 수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묵직한 철문이 눈에 들어온다. 건축가 이지은씨가 만든 ‘이상의 방’이다. 철문 안쪽 공간은 이상이 살았던 쪽방같이 어둠침침하다. 한줄기 빛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볕이 쏟아지는 2층 테라스로 나가게 된다. 이상의 집 기획·운영을 맡고 있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이은정씨는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도 끝내 자유로웠던 이상에게 건축가가 헌정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이상의 집은 이상을 기억하는 최초의 공간이다. 이전까지 이상과 관련된 번듯한 기념관 하나 없었다는 얘기다. 이상이 갖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참에 이상의 집이 들어서게 된 사연을 알아봤더니, 참으로 기구했다.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의 땅은 여러 필지로 쪼개졌다. 조각난 154번지 일대에는 살림집과 상가 건물이 경쟁적으로 들어섰다.

 본래 이 땅도 오피스텔이나 커피숍으로 개발될 운명이었다. 2002년 10월 중앙일보는 “이상의 집에 살던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으면서 시인의 흔적이 영영 사라지게 생겼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를 본 건축가 김원씨의 주도로 김수근문화재단이 철거 직전의 건물과 필지를 2002년 12월 매입했다.

 가까스로 154-10번지는 생존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 이상의 생가로 알려진 한옥은 2004년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6년 문화재 등록이 말소됐다. 이상이 듣는다면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을’ 이야기다. 다행히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건물과 땅을 사들였고, 이후 문화유산의 보전 활동을 하고 있는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관리하고 있다.

김해경, 이상이 되다

이상은 이곳 통인동 154번지에서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1913년 이상이 네 살 되던 해,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댁의 양자로 오면서 이곳에 거주했다. 보성고보(현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수석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다. 33년 폐병이 악화해 황해도 배천으로 요양을 떠나기 직전까지 20년간 이 집에 머물렀다. 통인동을 떠난 이상은 4년 후 일본 도쿄(東京)에서 죽었다.

 이상의 집은 이상 문학의 거점이다. 그는 이 집에 거주하면서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30년 첫 작품 『12월 12일』을 발표했다. 뒤이어 『조감도』(1931) 『건축무한육면각체』(1932) 등을 차례로 세상에 선보였다.

 2009년 『이상전집』을 엮은 단국대 권영민 석좌교수는 통인동 154번지를 “비극과 절망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통인동 154번지는 단순히 이상이 살았던 공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로 이상은 갈등과 고뇌를 번복했고 그것이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됐습니다.”

 이 집에서 이상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혔던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무엇보다 26년 큰아버지의 재혼은 이상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다. 평생 어머니처럼 모셨던 큰어머니가 쫓겨나고, 자신을 대신해 새어머니의 아들이 큰아버지의 정식 아들로 입적됐다. 타의에 의해 신분과 재산을 한꺼번에 박탈당한 이상은 더 이상 그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 길로 통인동을 떠났다.

 기생 금홍이와 함께 다방 ‘제비’를 운영했다가 금홍이와 헤어지고, 모던 걸 변동림과 결혼했다 홀로 도쿄로 훌쩍 떠나버린 이상의 행적은 통인동 시대 이후의 일이다. 통인동을 떠난 이상은 그의 대표작인『오감도』(1934)와『날개』(1936)를 남겼다.

 누구의 아들도 될 수 없고 누구를 아버지로도 여길 수 없었다. 이상은 외로웠고 외로웠기에 자유로웠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처럼 고독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과거를 살았던 현대인 이상에 공감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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