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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에 꽂는 여유필요|가난해도 보리이삭 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몇 달 전 일이다. 보리(맥)를 관상용으로 꽃집에서 팔고 있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낀 시민이 신문에 투고하여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었다. 그 시민의 글은 방송국에 채택되어 통근 버스의 「스피커」를 통해 낭독되었던 일이 아직 입혀지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상당한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데 보리를 꽃병에 꽂아놓고 구경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을 생각했다. 「크리스머스·이브」, 눈이 내리는 「페테르부르크」거리에 헐벗은 소년 하나가 창을 통해서 어떤 집안을 들여다보고 서있다. 방에는 불이 휘황하게 켜있고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파티」를 열고 있다. 그리고 전나무가 서있고 나무 위에는 솜눈이 덮여져있다. 눈 때문에 나는 이렇게 손발이 시린데 가짜 눈을 해 달다니, 하고 소년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소년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일체의 꽃을 가꾸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보리 대신 장미를 기르는데는 몇 배의 땅과 인력과 비료가 드는 것이다. 물에는 감자와 콩을 길러야 하고 광장마다 고구마 밭을 꽃밭대신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전통적으로 농경민족인 우리 나라 사람에게 양곡은 거의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관상용으로 쓰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보리는 자기가 밭은 일을 충분히 했고, 적어도 법주를 위해 소비되는 같은 양의 쌀만큼은 값있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모두 마음의 여유에 달려있다. 우리가 그처럼 아름다와 꽃병에 꽂는 보리를 먹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기까지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춥고 배고픈 가난은 가능한한 빨리 몰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머스·트리」가 세워진 이상 솜눈을 해 달지 말자는 호소는 아무래도 너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발문제도 그렇다. 다른 여러 현상과 마찬가지로 장발도 단독으로 생긴 유행은 아니다. 젊은이들의 옷이 수수해진 일과 같이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알맞은 장발은 이런 복장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지나친 장발은 물론 추하지만). 만일 이들이 10여년 전 청년들처럼 짧게 머리를 깎는다면 살벌해 보일 것이다.
나이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양복의 깃과 「넥타이」의 목이 넓어져서 여유 있게 보인다. 이 넓은 것과 「타이」에도 알맞은 장발이 어울린다. 만일 단발이 강요된다면 가느단 것과 가느단 「타이」로 돌아가라는 뜻이 되고 그런 옷은 각박감을 줄 것이다.
머리를 짧게 깎으면 머리감는 시간이나 수도물이 절약될 것이다. 비누 값도 절약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풍요한 사회가 이룩될 때까지 꽃 대신 감자를 심자는 호소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장발을 반대하는 것은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의미 때문이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퇴폐풍조에 젖은 사람들이 대개 「나일론」양말을 신고 있다고 해서 「나일론」과 퇴폐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사실과 부합되기는 하지만 별로 의미 없는 주장일 수도 있다. 퇴폐문제는 더 높은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가난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해 보리 이삭을 조금 자르는 것을 너그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장발도 반드시 단점하지 못한 머리라고 보지 않고 풍부한 머리라고 볼 마음의 여유는 없을까.

<필자약력>= ▲38년 서울출생 ▲서울대문리대졸업 ▲「에딘버러」대, 「아이오와」대 수학 ▲58년 문단「데뷔」▲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등 5권 ▲산문·시론집 『사랑의 뿌리』(76년 출판) ▲현 서울대 인문대 영문과 조교수 ▲현대문학식수상(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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