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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개발한 멸균 용기 … 방부제 걱정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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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벤느 온천장 광고 포스터.

요즘 화장품 시장의 최대 화두는 순수함이다. 효과 좋은 화장품보다 깨끗한 화장품을 찾는 소비자가 많아졌다. 피부과 시술과 기능성 화장품의 남용으로 피부가 민감해진 소비자가 늘고 있고, 방부제 등 화장품 일부 성분이 몸에 해로울 수 있다는 보도가 줄을 이어서다. 프랑스 온천수로 만든 화장품 아벤느는 이런 흐름 속에 주목 받는 브랜드다. 민감성 피부를 치료하기 위해 제약회사가 만든 약국 화장품(더모코스메틱·Dermocosmetics)이다. 5년 전 이 회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멸균 화장품 용기도 방부제 논란 속에서 재조명 받고 있다. 어떻게 이런 화장품 시장의 흐름을 한발 앞서 읽었을까. 제품이 태어난 온천 마을 아벤느를 찾아 비결을 들었다.

아벤느, 온천의 발견

프랑스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 아벤느로 가는 길은 모네의 풍경화를 닮았다. 초봄의 연녹색 싹이 나무마다 점점이 매달려 있었다. 샛노란 유채꽃밭이 중간중간 화려한 생기를 더했다. 남부의 중심도시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버스를 달려 두어 시간. 굽은 산길을 한참 올라 아벤느 온천센터에 도착했다.

세계적 약국 화장품 브랜드 아벤느는 바로 이 지역의 온천수로 만든다. 아벤느의 대표 상품인 오테르말 스프레이는 이 온천수를 멸균해 병에 담기만 한 제품이다. 얼굴에 수시로 분사하면 진정·보습 효과가 있다. 세계에서 연간 1억 병, 한국에서만 100만여 병이 팔린다.

이 지역 온천의 효능이 발견된 건 300년 가까이 된 일이다. 피부 질환이 있는 말이 온천수를 마시고 낫는 걸 보고 1743년 온천장이 들어섰다.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는 단순한 목욕 설비였지만 마을이 멀고 길이 험해 귀족들이나 즐길 수 있는 호사였다. 1874년 프랑스 보건부가 피부 질환에 대한 아벤느 온천수의 효능을 인정해 온천장을 공익시설로 인증했다. 아벤느 온천센터에서의 치료는 의료보험 적용을 받는다.

시골 약사 피에르 파브르

시골 마을 아벤느가 세계적으로 이름나게 된 건 1975년 유럽 3위 제약회사 피에르파브르 그룹이 온천센터를 인수하면서다.

지난해 작고한 회사 설립자 피에르 파브르 회장은 아벤느에서 100㎞ 떨어진 중소도시 카스트르의 약사였다. 카스트르 시내 중심가엔 작은 광장이 있는데, 그 광장 끄트머리에 50년이 더 된 그의 옛 약국이 지금도 있다. 황갈색 벽에 녹색의 투박한 글씨로 ‘약국(pharmacie)’이라고 쓰인 소박한 모습이었다.

약국 한 편엔 10㎡ 남짓한 그의 연구실이 있다. 매출 20억 유로(약 2조9000억원)의 제약회사는 이 작은 방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을 파는 와중에 파브르는 이 방에서 각종 식물의 효능을 연구했다. 처음으로 직접 개발한 약이 루스쿠스라는 백합과 식물로 만든 하지정맥류 치료제다. 주중엔 약국을 운영하고 주말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약을 팔았다. 61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더모코스메틱의 탄생

직접 만든 약으로 돈을 벌고, 파브르 회장이 처음 한 일은 재투자다. 식물 효능을 기반으로 만든 클로랑(Klorane)이란 화장품 브랜드를 65년 인수했다. 식물에서 추출한 효능을 바탕으로 피부 질환을 개선시키는 화장품이었다. 이후 그룹은 식물 원료로 두피 질환을 치료하는 브랜드 르네 휘테르(Rene-furterer), 아토피 치료용 화장품 아더마(A-DERMA), 문제성 두피·피부를 위한 화장품 듀크레이(Ducray) 등을 인수·론칭해 모두 8개의 화장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더모코스메틱이란 용어를 처음 만든 이도 그다. 피부과(Dermatology)와 화장품(Cosmetics)을 합성해 만든 이 단어는 미용보다 피부 질환 치료에 초점을 맞춘, 제약회사가 만들고 약국에서 판매하는 화장품을 가리킨다. 한국에선 그리 시장 규모가 크지 않지만 유럽에선 화장품 시장의 15% 안팎을 더모코스메틱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피에르파브르 그룹이 90년 출시한 브랜드 아벤느는 유럽 더모코스메틱 시장 1위 브랜드다. 아벤느 브랜드 하나로 올리는 매출이 지난해 기준 6억 유로(약 8700억원). 피에르 파브르 그룹의 더모코스메틱 부문 전체는 9억 유로(약 1조3000억원)가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화장품 공장의 ‘우주인’

아벤느 온천센터에서 개울을 건너고 잔디밭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현대적 외관의 아벤느 제조공장이 나온다. 유리창을 통해 녹색 정원과 개울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공장이다. 아벤느가 2009년 특허를 획득한 세계 유일의 멸균 화장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멸균 화장품을 생산하는 방은 이중으로 외부와 차단돼 있다. 착용에 20분이 걸린다는 멸균복을 입은 생산 직원은 우주인처럼 보였다. 머리를 완전히 덮은 옷과 마스크는 물론 두 겹의 장갑을 끼고 두 겹의 신발을 신었다. 아벤느가 멸균 화장품 생산 특허를 획득하는 데 걸린 시간은 8년이다. 멸균 화장품을 생산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화장품의 효능은 유지하되 내용물을 완전히 멸균할 것, 이를 깨끗이 소독된 멸균 용기에 담을 것,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내용물이 공기와 접촉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할 것.

그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는 용기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한 번 짠 화장품은 조금이라도 다시 용기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화장품을 짜는 과정에서 공기가 용기 안으로 새어 들어가도 안 된다. 8년 만에 개발된 DEFI(Device for Exclusive Formula Integrity) 시스템은 고정밀 튜브를 사용해 이 과정을 차단했다.

세계 유일의 멸균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아벤느 생산공장 모습. 공장의 유리창을 통해 녹색 정원과 개울물이 보인다.

방부제와의 싸움, 멸균 화장품

아벤느가 멸균 화장품에 매달린 이유는 방부제 때문이다. 방부제는 양날의 칼이다. 방부제 없이는 화장품의 성분과 제형이 몇 개월도 유지되지 않는다. 튜브나 단지 같은 기존 용기에선 내용물이 지속적으로 공기에 노출돼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안전성이다. 화장품 방부제의 안전성 논란은 유럽에선 80년대부터 제기돼 왔다. 국내에서도 최근 가장 널리 쓰이는 방부제 파라벤이 호르몬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와 떠들썩했다. 아벤느 브랜드 자문 피부과 의사인 디디에르 귀레로(Didier Guerrero)는 “천연 방부제로 알려진 농축 오일조차 많은 이에게 알레르기를 일으켜 완전히 안전한 원료라고 할 수 없다”며 “방부제 논란을 가장 완벽하게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 멸균 용기”라고 말했다.

수익성은 풀어야 할 숙제다. DEFI 용기는 일반 화장품 용기와 비교해 제작 단가가 5배 높다. 아벤느가 톨레랑스 익스트림 크림 등 일부 제품에만 이 용기를 적용하는 이유다. 아벤느 멸균 화장품 담당 매니저 에미릭 주미유는 “우선 가장 민감한 피부를 위한 제품에 멸균 용기를 쓰고 있지만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 니즈가 커져 점점 적용 제품을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법학도 출신 뒤쿠르노 사장
"돈보다 사람이 먼저 … 시장 작아도 약국 화장품에 집중할 것"

“저희는 큰 시장을 원하지 않습니다. 시장이 작아도 약국 화장품에만 집중할 겁니다.”

 에릭 뒤쿠르노(46·사진) 사장은 피에르파브르 그룹의 더모코스메틱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법학도 출신인 그는 시장 보좌역 등으로 정치 일을 하다 2000년 피에르파브르 그룹에 합류했다. 지난해 작고한 파브르 회장을 그는 “인생의 영광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셨던 분”이라고 표현했다. “돈을 버는 데 관심이 많으셨지만 본인이 쓰려고 버신 건 아니었죠.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곳 카스트르 인근의 시골집에 사셨는데, 프랑스 43위 부자가 사는 집이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작고 평범한 집이었어요. 여든이 될 때까지 직접 운전하고 다닐 정도로 소탈하셨어요.” 파브르 회장의 차는 르노자동차의 소형차 브랜드 트윙고였다고 한다.

 파브르 회장이 경영진에 남긴 유언은 “회사를 상장하지 말라”는 것. 단기 이익을 좇는 주주들에 의해 회사 경영이 좌지우지되는 걸 원치 않아서였다. 파브르 회장은 가족이 없었다. 본인이 가진 회사 지분을 모두 그룹의 공익재단인 ‘피에르파브르 재단’에 남겼다. 재단은 그룹 지분의 65%를 보유한 대주주다.

 뒤쿠르노 사장은 “회장님이 중시하던 가치를 이어받으려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장님은 평생 식물을 사용해 사람을 고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사셨지요. 당장 돈이 된다고 향수나 색조 화장품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문제 피부를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화장품을 만드는 것이 저희 일이니까요.”

아벤느·카스트르(프랑스)=임미진 기자 사진=아벤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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