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문 염원…서울∼평양직통전화|7·4공동성명 4조…북괴는 대화를 단절시키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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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보세요, 거기는 평양…여기는 서울인데 잘들립니까』로 첫통화가 시작됐던 서울∼평양간을 잇는 직통전화가 가설된지도 만4년-.
그동안 분단30년의 혈맥을 이으려는 애절한 대화가 이전화를 통해 북으로 숱하게 전달됐고 이에 쓸린 국민의 염원도 컸으나 7·4남북공동성명 4돌을 맞이하는 3일 직통전화는 시험통화 위주의 냉랭한 금속성의 기계음 「전달물」로 시들었다.
남북직통전화는 남북대화가 본격화하면서 한때 초점을 한곳에 모았으나 73년8윌 북한측의 일방적인 대화중단성명후,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전화선로의 이상유무를 묻고 대답하는 시험통화와 이따금 공식통지문만을 불러주고 있는 상태.
남북직통전화는 2회선.
하나는 남북조절위에 가설된것이고 다른 1회선은 남북적 본사에 연결된 것. 남북적직통전화는 71년9월22일 맨처음 판문점연락사무소간을 이었다가 이듬해 8월26일 상오11시30분남북적본사에설치, 정식개통되면서 한적의 추주년대변인과 북적대변인 조명일간에 『적십자사업을 잘해봅시다』는 첫통화가 이루어졌다.
남북조절위에 가설된 직통전화는 72년4월28일 가설된후 그해 7월4일 공식통화를 했다.
남북조절위간을 연결한 이전화는 72년당시 이후락전중앙징보부장과 김영주북괴조직지도부장간에 발표한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하고▲신뢰분위기를 조성하며▲제반교류실시및 궁극적으로는 형화와적자주통일접근을위한다는등 이른바 7·4공동성명의 정신에따라 남북간에 제기되는 문제와 불의의사태에 대비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정확히 처리키위해 설치되었던것.
직통전화는 전담직원 3명씩을 각각 고정배치하고 매일 고장여부를「체크」하는 시험통화와 본통화를 해왔다.
전화운용시간은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상오9시∼12시와 하오4시∼8시 사이.
시험전화는 매일10시에 이뤄지고 있다.
시험전화는 서울쪽에서는 흘수일만 평양을부르고 그쪽은 짝수일에 「다이얼」을돌리게 되어있다.
직통전화의 운용도 남북대화의 진전에 따라 우여곡절을 함께했다.
대화가 한창 「피크」를 이루었던 72년부터 73년 여름까지는 서로를 부르는「벨」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73년8윌28일 김영주가 대화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부터 선로의 이상 유무만을 간단하게 「체크」하는기계로 전락했다.
그동안 오간 통화는 모두 3천1백18건. 남북적십자 직통전화는 본통화가 44건·시험통화 1천7백88건이고 남북조절위직통전화는본통화 2백37건·시험통화1천49건.
이가운데 대화가 절정을이루었던 73년의 통화수는9백50건(남북적 시험통화6백23건·본통화12건, 남북조절위 시험통화2백54건·본통화61건)으로전통화의52%.
올들어서는 3백25건(남북적 1백74건·남북조절위1백51건)으로 두드러지게 줄었고 이마저 본통화는 남북적이 단3건·남북조절위가9건에블과하다.
직통전화 종사자들은 요즘 매일같이 지극히 기계적인 시험통화를 계속하면서도 남북간의 유일한 접촉수단이 행여나 고장이 생길까 우려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신중하게 다루고있다는 것이다.
이동복조절위 대변인은『직통전화는 남북대화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접촉수단』 이라면서 『직통전화의 통화내용이 일방통행적인 것이 아니고 왕복통행의 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반도 평화정착에 무언가 실마리가 잡히게 될것』이라고 「메아리없는 전화」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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