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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과 민중의식|한국사 대 토론…우리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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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륜하는 재구>
「실학」이라는 말은 원래 특정된 개념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이든「허」에 대해서「실」을 강조하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불러왔다. 송대 학자들이 불교에 대해서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내세웠고 이 성리학을 수업한 고려말기의 사대부들 가운데 이제현·안축 등이 또한 불교와 구별해서 그들의 유학을 실학이라고 일컬었다. 고려로부터 조선전기에 들어오면 성리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이매재·이퇴계 등도 모두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불교에 대해서는 물론, 노장 학 및 사장 학 등에 대해서 성리학의 가치를 높이는 말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을 지금 일반적으로 실학이라고 일컫고 있거니와 당시의 학자 자신도 자기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자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성호 이익은『학문이라는 것은 재구, 즉 세상을 경륜할 수 있는 재구가 갖추어져 있어야 비로소 실학이다』라고 하였고, 연암 박지원은『사의 학문은 농·공·상을 아울러 포괄해야하는 것이니 그것이 실학이다』라고 하였다. 성호가 정치경륜의 구체적 식견과 능력을 실학이라 했다면 연암은 농·공·상에 관한 학을 실학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같이 실학의 어의와 문헌상의 용례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실학은 매재·퇴계의 성리학이 아니고 주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 즉 성호나 연암을 포함한 일련의 학자들의 사상 조류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근대 지향적 학문>
조선후기의 실학에 대해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계몽기인 구한말의 애국적 선각 학자였던 박은식·장지연·신채호 등이었다. 이들은 학문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실학을 우리의 전통사상으로 애국적 정치·문화활동에 하나의 정신적 자원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에 접촉한 서양학문들, 정치학·경제학내지 자연과학 등이 너무나 경이의 대상이 되고 그것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학문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성호·연암 같은 분들의 학문이야말로 오늘에 실질적 의미가 있는 학문이라고 해서「실학」이라고 존상하게 되었다.
조선전기의 성리학이 봉건사회의 상승기·안정기에 있어서 양반 지배층의 학문이었음에 대해 이조후기의 실학은 봉건사회의 하향기·해체기에 있어서의 양심적 학자·지식인의 사상이었다. 봉건사회의 하향기·해체기에 있어서 역사의 방향은 근대로의 지향이다. 학자들은 역사적 제약 때문에「근대」라는 시대개념을 창출해내지는 못 했다. 그러나 당시 봉건사회의 말기적 징후 속에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차원이란 바로 근대로의 방향으로 통하는 길이다.

<폭넓은 연구분야>
우선 학문적 명제만을 보더라도 근대화 과정에 필수적인 토지제도와 상공업문제, 그밖에 생산기술의 혁신, 생활 및 사고에 있어서의 합리주의적 정신의 보급에 관한 한 것들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것이 근대 계몽기의 선학들에게 현실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반세기를 훨씬 지난 오늘 우리들에게도 실학으로 통하는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실학의「실」을 실용·실증, 또는 진실·성실의 뜻으로 해석하고 실학을 그러한 실에 해당하는 학문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실학의 학문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용은 학문의 기능에 속하고 실증은 학문의 방법에 속하고 진실·성실은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에 속한다. 이러한 것은 어떠한 학문에도 있어야 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실학을 특징 지울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보다도 실학이라는 학문을 쉽게 알기 위해서 1차적으로 실학의 분야를 획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근대적 문화를 이룩하지 못했던 시대의 학문이었던 만큼 오늘의 기준으로 분야를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조후기의 실학이 당시의 현실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고 현실문제는 정치·사회·경제를 뜻하는 것이니까 실학의 학문적 분야는 우선 사회과학적 분야라고 할 수가 있다. 종래 우리는 실학의 학문적 내용에 관한 설명에서 너무 나열하는 느낌이 있었다. 경세학·자연과학·역사지리학·언어학 심지어 백과사전파 등등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열거함으로써 필경 실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실학을 몇 개의 유파로 정리해서 경세 치용파(성호파), 이용후생파(연암파), 실사구시파(완당파)로 구분하고 각 유파의 특색을 말하기도 했으나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실사구시 등의 명칭이 모두 현대적 용어가 아니어서 오늘의 학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럼에도 불구, 실학의 설명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실학의 모든 것 중에서 경세학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경세학은 곧 정치·사회·경제를 다루는 학이므로 위에서 말한 사회과학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종전처럼 경세학을 많은 나열된 학문 속의 하나로 보지 말고 경세학 그것으로 실학을 특징지어, 실학을 바로 정치·사회·경제의 분야로 규정함이 마땅하다고 믿는다.
실학이 현실문제로서의 정치·사회·경제문제만으로 자기분야를 획정한다면 앞서 열거한 역사지리학·언어학·자연과학 등은 이제 모두 실학의 영역에서 할애되고 말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실학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새로운 인식·새로운 관찰이 폭을 넓히고 자아의 각성이 도를 가할수록 자연의 이법 및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실학의 저변이 그만큼 확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민」의 개념 생겨>
우리는 실학의 분야를 정립시키는 한편 실학의 저변확대로서의 여러 부문에 관해서도 종·횡으로 그 상호관계를 서술함으로써 실학사의 내용을 보다 풍부히 하게 될 것이다.
실학이 경세학이라고 했지만 경세학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 조선전기의 성리학파 중에 경세학이 있었고 특히 초기로 소급해서 양성지·정도전 등 관료학자 중에 경세학의 업적은 간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실학이 저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일부 인사 중에는 조선후기의 실학을 15세기 사상의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역사인식의 문제다. 역사가 단순한 반복을 하지 않는 이상, 사상사의 현상을 지난 것의 부활로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시대성이 파악돼야 한다. 조선전기의 경세학이 봉건사회의 상승과 안정에 공헌한 것이라면 이조후기의 실학은 봉건사회의 하향·해체과정에서 온갖 모순을 지적하고 전면적 개혁을 통해 근대를 지향하려던 것이다. 이 시기의 모순은 크게 보아 정치구조·권력상의 모순·사회구조(계급·신분)상의 모순·경제구조상의 모순을 들 수 있으며 실학의 개혁사상은 한마디로 구조개혁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개혁론은 전통적 사민관(사·농·공·상)을 해체시키고 새로운「국민」개념을 형성케 하였다. 전통적 사민관은 사회계층 질서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실학은 이 계층질서를 배제하고 직업적 분화로서의 사민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우선 사·농·공·상에 있어서의 사의 특권의식을 부정함으로써 사를 민으로 끌어 내렸다. 이와 함께 공·상의 경제적 가치 창조기능을 인정함으로써 수공업자와 상인을 농민과 같은 위치에 올려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사·농·공·상을 일체로 하는 새로운「국민」을 생각했고 이 사상적 기반에서 새로운 국가관을 펼쳐 내었다. 다음 실학의 사회성이 중요의미를 찾는다.
실학시대에 있어서 현실문제에 심각한 관심표시와 자기 나름의 개선책을 제시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의 기본입장이 어떠한 사회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던가는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 가운데는 정부의 고위관료도 있고 민간 재야학자도 있다. 그밖에 여러 가지 계층 출신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현실문제를 다루었다고 해서 모두 실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다. 적어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실학파에 하나의 역사적 위치를 설정하고 역사적 성격을 부여하려면 무엇보다 실학의 사회성이 먼저 이해돼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같이 현실문제를 논하더라도 지배층의 입장에서 부분적 개혁으로 현실을 미봉 하면서 당시의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는가 하면 민간학자들은 전면적 개혁으로 민중의 진로를 타개하려는 방향을 갖기도 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실학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 민간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일까. 종래 우리는 조선사대부의 계층적 분화에서 정치적으로 거세당한「사」의 계층이 이뤄지고「사」중에도 서울 및 근기 지방의 사들이 중심이 되어 실학의 학풍을 이룩한 것으로 설명해왔거니와 사실 당시의 전국 도시와 농촌에 상당히 광범한 새로운 지식대중이 생겨났다.
따라서 지식대중의 집약된 사상이 실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실학은 결코 몇 사람의 천재적인 학자인「사」의 사상이 아닌 것이다. 이들 지식대중은 그 생활환경이 지배층보다 전체민중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은 당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데 있기보다 전체민중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려는데 그 본래의 목적이 있었다. 이 같은 지식대중의 집약된 생각이 실학사상이기 때문에 실학은 동시에 민중의 면에 선 지식인의 사상이며 개혁론일 수밖에 없었다.

<면면히 일세기반>
실학파에 있어서 민중의 문제를 재래의 민본주의 이론으로 호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실학이 반계 유형원에서 다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만 l세기반이 넘는다. 그 동안에 우리나라의 사고는 무척 달라졌다. 비록 중세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근대지향이라는 사정이 근대에 가까워 오면서 자꾸 달라지고 거기에 따라 민중의 움직임도 대단히 달라졌다. 이에 따라 민중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말·조선 초에 정도전 일파의 민본 적 정론이 있었다. 그후 성리학파 중에 조정암과 이매재 같은 분들이 있고 특히 매재는 선진고전에 나오는 민본주의적 어구들을 많이 내세우고 심지어 관리를 채용하는데 있어서도 국인에게까지 문의를 해야된다고 해서 확대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있다. 아뭏든 선진고전의 용어들을 그대로 썼다는 데 그의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위정자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그대로 두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매재 보다 훨씬 후대의 허균 시대에 오면 조금 다르다. 허균의 호민론은 지배층에서 내려다보고 동점심을 갖는 것에서 한 걸음 나오고 있는 것 같다. 허균의 민중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민중의 편에선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태도가 상당히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반대로 김육의 상소문들을 읽어보면 민중의 동태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결론은 모두 민중에게의 동정이라기 보다 이대로 두면 국가가 망한다는 어디까지나 국가정책면에서 민중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학파 학자들 가운데서도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성호를 거쳐 다산에 이르면 점점 민중의 편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산의『탕론』과『여전론』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라서 실학의 민중성은 다산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민본주의로 일괄될 것 같지만 본질적 차이는 각자의 입장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은 학문의 분야로서 사회과학에 해당하며, 실학파는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근대지향의 행정 속에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고 나아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일군의 민간학자·재야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표집필 이우성
참석자
강만길(한국사·고대교수) 조기준(경제사·고대교수) 이우성(한국사·성대교수) 천관우(국사학자)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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