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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없다 탓 말고 세상과 맞설 배짱 가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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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유로자전거나라투어에서 만난 장백관(50) 대표는 사회 진출을 앞둔 보육원 아이들에게 “조건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 잃은 일곱 살 소년은 교실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보며 ‘날 버린 엄마는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러곤 엄마를 찾아 지구 곳곳을 누비는 꿈을 꿨다. 소년은 커서 100여 개국을 여행하고, 직원 100여 명을 둔 중견 여행사의 사장이 됐다. 유럽 전문 여행사 ‘유로자전거나라투어’ 장백관(50) 대표의 이야기다.

 장씨는 1964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재혼했다. 의붓어머니는 이유 없이 장씨를 미워했다. 밥을 굶기거나 걸핏하면 때렸다. 장씨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서울 은평구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맡겨졌다.

 보육원 생활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매일 아침 보육사가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도망가면 이렇게 된다”며 때렸다. 끼니를 굶기 일쑤였다. 16.5㎡(약 5평) 남짓한 방에 30여 명의 아이가 ‘칼잠’을 잤다. 11세 때 마리아수녀회가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환경이 좋아졌다. 서울소년의집(현 꿈나무마을)으로 명칭도 바뀌었다.

  “엄마라고 부를 대상이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수녀들의 보살핌 속에서 장씨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학창시절 방황하던 그를 잡아준 것은 수녀들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부산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기업 계열 카드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고아’란 꼬리표가 장씨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출신학교를 묻는 질문에 소년의집이라 대답하면 사람들은 ‘소년원 출신’이라며 수군거렸다. 남들 못지않게 실적을 올렸지만 매번 승진에서 탈락했다. 학연과 끈이 없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매일 밤 울분이 치밀었다. 외환위기의 광풍이 몰아치던 2000년 장씨는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마닐라 빈민가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허술한 판잣집에서 식사를 하던 그들의 얼굴에선 가난의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부모가 없어 이런 설움을 받는 건가’라는 자괴감에 빠졌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가진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장씨는 곧바로 유럽으로 떠났다. 이탈리아 한인 민박집에 머물며 여행객들에게 자원봉사로 여행 가이드를 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그에게 여행 가이드 요청이 쇄도했다. 낮에는 가이드로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1인 창업을 했다. 회사를 세운 지 5년 만에 누적 고객 수 3만 명을 달성했다. 여행사는 유럽 7개국에 진출해 연 매출 수십억원을 올리고 있다. 회사 사훈은 ‘늘 가족처럼’이다. 장씨의 휴대전화 배경은 꿈나무마을 설립자인 슈월츠 몬시뇰(1930~92) 신부다. 그는 몬시뇰 신부를 “내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그의 꿈나무마을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매주 꿈나무마을을 찾아 아이들을 만난다. 2년 전부터는 장학재단인 ‘알로이시오열매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장씨는 “인본(人本)주의 문화가 뿌리 깊은 유럽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 대한 편견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사회적 시스템이 잘 정비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정치인들은 보육원 아이들이 표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지원정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냐”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장씨는 보육원 출신 후배들에게 “출생 배경을 탓하고 인맥이 없다고 좌절에 빠져 있어서는 곤란하다”며 “세상과 맞설 수 있다는 깡다구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취재=강기헌·장주영·이유정·정종문·장혁진 기자
◆사진=김상선·송봉근·박종근·김성룡·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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