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한국인 운전사와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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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반다라바스」항의 우리 나라 운송용역기지는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전쟁을 위한 군사기지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국제우정의 기지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가슴이 뿌듯했다. 오후에 소맥 20t을 싣고 1천6백24km거리의 「테헤란」으로 떠나는 「이란·탱거」수송회사 소속의 독일제 「벤츠」대형 「트레일러」의 운전석 옆에 편승하기로 했다. 운전하는 기사는 인천출신의 문세윤씨라는 30대의 젊은이인데 3박4일의 장거리 운송을 도맡고 있었다.
이 「트럭」에 오르려고 하는데 이 「트럭」은 주로 곡물을 나르는지 발판엔 쌀이며 녹두 낟알이 떨어져 있었다. 조수석에는 쌀자루·물통·김치항아리·파·마늘·「버너」·남비며 담요들이 있는 것을 보니 자취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가족사진이며 고국의 그림이 있는가 하면 우리 나라의 달력이 있는데 날짜마다 사선이 그어져 있었다. 얼마나 고국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문씨는 사무계통에 어울리는 「타입」이지만 정작 「핸들」을 잡으니 운전하는 솜씨가 그럴 듯해 보였으며 믿음직했다.
교외로 나가니 길 왼쪽에 초라한 울타리가 쳐있는 지역에는 집이 띄엄띄엄 보였다. 울타리 밖에는 자가용차들이 멎어있는데 울타리 문 앞에는 순경이 서있었다.
무엇인지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에 알아보니 사창가였다. 사창가가 도시와 떨어진 이런 곳에 있는 것은 아마도 도시정화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저녁 8시까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선 밤이 아니라 낮에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란」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지만 「섹스」의 풍조는 막을 길이 없는가보다. 「프로이트」는 인생의 전부가 성이라고 했는데 신앙보다도 강렬한 것이 「섹스」이고 보니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더구나 이 나라는 일부다처로서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사람은 남의 여자까지도 차지하고 있어서 돈이 없거나 신분이 낮은 남자들은 좀체로 여자를 대할 길이 없어서 어쩌다 이런 데에 오면 남이 볼세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트럭」얘기로 돌아가야겠다.
우리 동포가 운전하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교외에서 스치는 자동차들이 많은데 「이란」사람들의 운전은 여간 거칠어 보이지 않는다. 한 때 낙타를 타고 지루한 사막길을 걷던 대상의 이 후예들은 도리어 반작용으로 그렇듯 차를 빨리 모는지 광적일 만큼 사나워 보인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기사의 운전은 여간 침착하지가 않다. 감히 운전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
사막길은 평탄하지만 어쩌다 비가 와야 개울에 물이 흐른다. 그러나 지금은 메말라 있었다. 얼마쯤 가니 「콘크리트」로 된 자그마한 다리들 위에는 돌을 담은 큰 깡통을 놓아두거나 아니면 돌을 몇 개씩 쌓아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그 다리아래에 창부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영업의 표시라고 한다. 13년 전 이 나라에 왔을 때 꽤 많이 돌아다녔지만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 지역에만 이런 풍습이 있는지 아니면 최근 생긴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 풍습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잠시 차를 멈추고 돌이 든 깡통이 놓여있는 다리 아래에 들어가 보니 창부커녕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이 날이 「이슬람」교의 주일인 금요일이어서 쉬는 것일까.
만일 직업의식보다도 신앙이 더 강렬하여 「코란」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쉰다면 비록 지금은 몸을 파는 생활을 하지만 종교로써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지붕만이 있고 벽이 없는 창부의 방」이라고 생각되는 다리 밑에서는 무슨 향수가 풍기는 듯도 하다.
이런 창부는 가장 비참한 생활전선에 나온 최하류의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일 것이다. 창부의 모습은 비참할테니 오늘따라 이 다리 밑에서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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