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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우근 칼럼

연아와 아사다의 동반 점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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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은메달에 머물게 된 김연아 선수는 편파 판정 의혹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금메달은 더 절실한 사람에게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건 뒤 2연패를 달성하기 위해 허리뼈가 뒤틀리고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참아가며 4년 동안 고된 훈련을 거듭해온 젊은이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원숙한 품격이 배어나는 금메달감의 웅변이었다.

 피겨 팬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준 김연아 선수는 스포츠 신화에 여신(女神)의 이름을 새기고 은퇴했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舞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가 흐르는 빙판 위를 꽃나비처럼 날아다니던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그야말로 숨 막히는 전율의 무도, 아라비아의 왕비처럼 우아하고 이채(異彩)로운 춤이었다. 스물세 살의 어엿한 숙녀를 그냥 ‘연아’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살갑도록 친숙한 우리네의 딸이요 조카이며 언니이자 동생이다.

 연아의 10년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는 소치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다. 쇼트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16위까지 밀렸던 아사다는 프리에서 완벽한 트리플 액셀을 펼치며 종합 6위를 기록했다. 아사다는 이렇게 회고한다. “김연아는 대단히 훌륭한 선수다. 내 스케이트 인생에서 하나의 좋은 추억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아 역시 “아사다 마오가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연아의 뒤에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의 눈물겨운 보살핌과 희생이 있었던 것처럼 아사다에게도 가슴 저미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다. 아사다를 세계적 선수로 키워낸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트리플 액셀 연습에 몰두하는 동안 간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눕는다. 아사다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간을 떼어 이식해 주려고 했지만 제 몸보다 딸의 앞길을 더 걱정한 어머니는 간 이식을 끝내 거부한 채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사다의 여린 가슴에 피눈물이 고였을 것이다.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 순위에 들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아사다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순간, 삼국지에서 주유가 토해낸 울부짖음이 머리를 스쳤다. “이미 주유를 내시고 어찌 또 제갈량을 내셨나이까(旣生瑜 何生亮).” 주유는 열패감으로 무너졌지만 아사다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연아의 그늘에 가려 오랫동안 가슴을 펴지 못한 아사다에게도 연아 못지않게 영예로운 은퇴가 준비되기를 기대한다.

 연아와 아사다는 1990년 9월생 동갑내기다. 두 선수는 숙명의 적수이자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공생(共生)의 관계이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과 일본의 국민적 자존심을 대변하는 경쟁의 아이콘이었지만 소치 이후에는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다. 애증(愛憎)의 경쟁관계는 끝났다. 그래서 제안한다. 이제부터 두 사람이 손에 손을 맞잡고 한국과 일본의 곳곳을 순회하는 조인트 갈라 쇼에 나서 주기를, 은반 위의 환상적인 동반 점프로 상생의 미래를 향해 함께 도약하기를.

 동일본 대지진 때 수많은 한국인이 피해 현장으로 달려가 복구 작업에 땀을 흘렸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은 수요 집회를 중단하고 대재앙의 희생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일본에도 극우파의 역사 왜곡을 꾸짖는 양심적 지식인, 광기의 혐한(嫌韓) 시위대를 막아서는 용기 있는 시민, 안중근 의사의 추도식에 참석해 경건히 머리 숙이는 열린 지성이 적지 않다. 연아와 아사다가 이들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가는 선린(善隣)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한·일 두 나라 정상은 지난달 헤이그에서 어렵사리 만났지만 가로막힌 벽은 뚫지 못했다. 독도·위안부·역사교육 등 3대 현안에서 줄곧 트리플 엉덩방아를 찧는 아베 정권이 시대착오적 억지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 세대는 달라야 한다. 불행했던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쇼트에서 무너진 아사다가 프리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처럼 일본이 반문명적 식민 지배의 과오를 뉘우치고 인류문명사에 성실한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기 바란다. 우리 또한 남쪽에 골칫거리를 둔 채 북쪽을 경영할 수 없다. 통일의 큰길에 일본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우호의 관계로 이끌어야 한다. 연아와 아사다, 세계 정상의 두 선수가 기나긴 라이벌의 평행선을 그보다 더 긴 파트너의 동행 길로 승화해 간다면, 빙판처럼 차가운 한·일 관계도 감동의 동반 점프로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