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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나무와 돌의 건축가 "콘크리트를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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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구마 겐고가 설계한 나가사키현미술관. 부지 한가운데를 지나는 운하를 이 건물의 강점으로 활용했다. 다이시 아노 촬영. [사진 안그라픽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구마 겐고 지음
민경욱 옮김
안그라픽스
344쪽, 2만원

“‘당신은 언제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제가 국립요요기경기장(단게 겐조 설계)에 발을 내디뎠을 때입니다. 그 아름다운 지붕의 곡면을 핥으며 쏟아지는 빛의 모습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57)의 얘기다.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한 일본에서 겐고는 아직 그 명단에 들지 못했지만, 앞으로 이 상을 받을 만한 유력한 후보자로 꼽힌다. 중국·러시아·프랑스 등 국경을 넘나들며 일하고 있는 그는 『자연스러운 건축』 『연결하는 건축』 『삼저주의』 등에서 ‘20세기에 반기를 드는 건축’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단단한 목소리로 들려줘왔다.

 그가 자신의 35년 건축 여정을 풀어놓았다. 무게 잡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흡인력 있다. 건축 얘기인가 싶다가도 “저는 포기를 알고 나서 건축이 재미있어졌습니다”처럼 어느새 인생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중국·한국·러시아 프랑스 클라이언트(건축주)를 비교하고 일본 사회의 ‘샐러리맨 문화’(책임 회피주의)에 대해서도 성토한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듯하다. 그가 어떻게 일본의 시골 건축주를 감동시키고, 나아가 세계 건축주들을 사로잡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솔직하지만 오만하지 않고, 반골 기질이 풍부하지만 낙천적이고, 게다가 스토리텔링 솜씨도 빼어나니 말이다.

구마 겐고

 겐고의 철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키워드는 ‘샐러리맨 문화’와 ‘콘크리트’다. 둘 다 그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제게는 ‘이건 그냥 너무 싫은’ 건축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싫었던 건 콘크리트에 의존해 만들어진 무겁고 영원할 것 같은 건축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자신을 입증하는 건 현장, 즉 실제 건물을 통해서다. 겐고는 1991년 도쿄에 데뷔작 건물 ‘M2’를 지었지만 ‘과잉’ ‘거품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받은 뒤 10년 동안 도쿄에서 일을 잃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시기가 자신에게 가장 내실 있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방으로 눈을 돌렸다. 돌을 소재로 한 돌미술관, 삼나무를 활용한 나카가와히로시게미술관을 설계하며 획일적인 콘크리트에 대항하는 ‘작고, 약하고, 자연스럽고, 잇는’ 건축철학을 다졌다. 그를 세계적 건축가로 만들어준 중국 데뷔작이 ‘대나무집’이었다. 그는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로 유명한 선배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대해 “똑같은 노출 콘크리트를 한다면 그를 이길 수 없어서”라고 조심스러워했지만 “콘크리트는 겉모습에 약한 인간심리를 이용하는 사기일 뿐입니다. 콘크리트가 만드는 건축은 돌이킬 수 없는 건축입니다”라고 비판한다.

 책에는 흥미진진한 일화가 가득하다. 지난해 준공한 제5대 가부키 극장, 자신감 넘치는 한국의 클라이언트, 당일 설계시험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사무소 운영법 등등. 그는 “앞으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게 한국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무서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아직은 겐고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의 시간과 목조의 시간을 따지며 자신이 꿈꾸는 것을 ‘죽음을 성찰하게 하는 건축’ ‘살아온 것 같은 건축’이라고 말하는 그가 말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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