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화해·질서를 바탕으로 용서하는 정신이 생활화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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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용서」란 말을 많이 쓰고있다. 용서를 받을 사람, 또 용서를 해줄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는 다양하여 제3자는 좀처럼 그 진실 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받아야 할 사람의수는 많고 용서해 줄 사람의 수는 좀 적은 것 같다. 그만큼 이 사회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이라 하겠다. 용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가장 심각한 관계성을 가지고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한다. 용서받지 않고는 안될 운명에 처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을 용서해야 할 계획이 수립되고 섭리가 구체화되어졌고 또 오늘도 그 섭리는 진행과정에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완전히 파멸이다. 그의 용서 없이는 영영 인간의 가치를 회복할 수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길은 하나님의 용서뿐이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이 용서의 명분을 찾으시고 조건을 만드시기에 이르렀다. 만드신 동기와 과정을 「사랑」이라 한다. 용서의 명분은 대속에 근거를 두고 만드시는 것이다. 그 대속물로 자기의 독생자 애수를 취하여 성육신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케 하였다. 그리고 부활·승천케 하시어 인간회복의 역사적 대의명분을 실현하게 하신 동시에 회복된 인간에게 그 생명을 영원과 연결시키는 산 증거를 보이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용서의 조건이다. 이 조건은 인간의 회개다. 용서의 아량과 대속의 명분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셨는데 단 조건은 인간의 자세 하에 둔다. 용서를 바라는 인간이 그 마음에 참된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의 구원은 결정된다. 인간은 회개하는 능력도 사실상 없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의지로 아무리 자기 잘못을 회개하려야 회개할 능력이 없다. 죄악의 억압과 유혹은 너무나 강한 차단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에 힘입어 그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잘못을 뉘우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너의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주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회개도 불가능하고 용서도 미치지 못한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와같은 이치는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용서에는 반드시 어떠한 질서가 성립되어야 한다. 빚진 자가 탕감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빛을 갚는데 주력하는게 원칙이다. 죄 지은 자가 용서를 받는 것은 좋으나 죄짓는 동기와 용서받는 과정과 용서받은 후에 받은 자와 준 자의 자세가 문제다. 인간에의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한 것이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린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는 일단 용서하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관용이 풍만하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용서는 화해라는 정신이 작용해야 한다. 화해란 역시 사랑과 같은 정신인데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그야말로 과거는 완전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심한 갈등과 반목과 불화가 팽창해 가는 느낌이 있다. 대화와 화해와 사랑과 용서를 인간들은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대화·화해·사랑·용서가 부재하는 사회로 달음질친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용서, 화해를 바탕으로 하는 용서, 그리고 새 질서를 토대로 하는 용서의 정신이 생활화될 때 오늘의 문제들이 수습될 것이다. 【김해득 정령<구세군대한본관 서기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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