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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토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당쟁과 사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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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민족성과 당파성>
과거의 침략주의적 어용 사가가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씌운 커다란 몇가지 굴레 가운데 「민족성」이란 문제가 있다.
한국인은 단결심이 약하고, 당파성이 강한 민족성을 가졌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보아도 분명하다는 뜻으로 말한 뒤에 꼭 당쟁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어느 민족의 경우에나 고칠 수 없는 선천적 민족성이란 것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학문이란 이름 아래 역사를 연구한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런 교활한 「학설」이 거듭되는 동안에 급기야는 우리 자신도 이에 말려들어 민족성 선천적이란 점을 인정하고, 이런 단점을 고쳐야겠다는 「민족개조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원래 타고난 것이라도 고쳐야겠다는 비장한 결심은 좋지만 고정 불변이란 애당초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 「민족성」이란 말은 과거 우리 민족 지도자의 논리까지도 흐려 놓은 야릇한 상형문자다. 우리는 「민족성」이란 말만 나와도 공연히 섬뜩해지며 열등감을 느낀다. 일제가 물러간 지 30여년이지만 그 잔재는 가시지 않았다.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권력을 둘러싸고 지배층 내부에서 서로 배타적인 항쟁을 일으키는 것은 어느 때나 있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민족이 가졌던 시대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났을 뿐이다.
따라서 당쟁이란 조선왕조의 역사적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선천적인 성격과는 아무 관계가 없음은 물론이다. 다만 당쟁이 있던 시대가 현대사와 이어지는 시기였다는 사실과,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가 그로 말미암은 바 적지 않다는 점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철저히 반성해야겠지만 침략을 정당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 능력을 말살하려는 수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화·당쟁의 원인>
사화나 당쟁은 꽤 끊임없이 있었느냐는 문제는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학자들이 논의해 오던 바이나 여기서는 몇 가지 예만 들어보기로 한다.
실학파에 속하는 학자로 『성호사설』을 남겨 널러 이름이 난 이익은 『명당은 쟁투에서 나으며, 쟁투는 이해에서 생긴다. 따라서 이해가 절실하면 당파도 굳어진다.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두개의 당이 되고, 리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네개의 당이 된다. 그런데 이는 늘지 않고 사람만 늘어나니 당파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하여 『이를 없애야 안정된다』는 대책을 주장하였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문관 인사의 추천권이 이조의 정랑과 좌랑에 있으므로 누구나 그 자리를 부러워하는데 정랑과 좌랑 자신이 후임자를 자천하는 제도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밖에도 『당의통략』을 쓴 이건창은 8개항에 걸쳐 다각도로 지적하였으며, 『조선 정감』에서 박제형은 서원에 폐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거를 확충하여 근래의 여러 학자들도 저마다 의견을 발표하였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점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그것은 당쟁의 주역이었던 사림·관료층이 생활은 농장에 의지하고 문화는 농장속의 서원에서 흡수하면서 특권적인 「재지족당」으로 성장하였는데 그들은 항상 관리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림에 대한 탄압>
이러한 의견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사화와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 성격을 살펴보자. 우리가 흔히 「사대사화」라고 부르는 사건은 연산군4년(l498)에서 명종 즉위년(1545)까지 약 50년 동안에 일어났다.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는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가 사초 문제로 김종직계의 신진 사림파를 탄압한 사건이다.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는 임사홍 등 궁중과 가까운 세력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의 추종 문제로 정부의 훈구와 신진을 모두 탄압하였던 특수한 사건이었다. 중종 11년의 「기묘사화」는 남곤·심정 등의 훈구파가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를 다시 한번 탄압하는 사건이었으며,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는 윤임·윤원형의 두 외척이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되어 윤임을 지지하던 사림파가 탄압된 사건이었다.
권력투쟁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빈번히 일어났던 현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이나 김종서 등의 실각·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중종반정과 같은 일종의 「쿠데타」 등 그 유례가 적지 않다.
사화의 경우에도 왕위 계승이나 왕비 책립과 같은 왕실 또는 외척과의 관계가 원인이 된다는 점, 또 그 투쟁의 방법으로 음모가 따랐던 점 등은 종래의 정쟁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사화 이후의 정쟁은 종래의 그것과 성격이 다른 면도 적지 않으니, 우선 항속적인 파당을 기초로 하였다는 점이 있다. 그것도 당면한 목표를 위해 형성되는 파당이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사상을 토대로 하여 중앙과 지방에 걸쳐 뿌리를 박고 정치상의 현상에 따라 부심을 거듭한 「사림」이라는 조직 내지 세력이 정치의 표면에 나서서 그들의 대립 세력과 충돌하여 화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의 대립 세력이었던 훈구·외척, 또는 궁중과 가까운 세력은 사림과는 달리 조직적인 파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탄압은 소수의 음모로 시작되었지만, 탄압을 받는 세력은 관료는 물론 유생까지도 동원되어 다수가 공공연한 논의를 투쟁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연암 박지원의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라 한다』는 말은 사화의 성격을 적절히 표현했다고 보겠다.
흔히 사화라면 「사대 사화」를 일컬으나 뒤의, 당쟁에서도 많은 사류가 일시에 화를 입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또 당쟁이 그 내용에 있어 사화와는 차이가 있지만, 붕당도 이미 사화를 전후하여 싹텄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쟁은 권력 쟁탈이 진행되는 상태며, 사화는 그 싸움에서 패자가 망하는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토중래 꾀하며>
이와 같이 사림은 여러번 화를 입자 학문과 진치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는 유학 본래의 면목에 충실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정치의 뜻을 버리고 산림에 숨어 학문과 교육에 몰두한다. 이때의 학풍은 종래 사장에만 주력하다시피 한데서 한 걸음 나아가 철학적인 사학과 이론을 주안으로 하게 되니 한국의 유학은 유심론 철학으로서 그 전성기를 맞은 듯한 감이 있다. 서경덕 이언적 김인후 이황 조식 기대승 등과 좀 뒤떨어져서 이이 성혼 등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많은 향학 의도가 지방에 퇴거하는 이런 대학자를 좇아 모이게 된다.
이와 같은 세력은 문인·사우들로 굳게 얽혀졌으며 명종대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 세력은 마치 고려시대의 사원과 같은 경제적·문학적 기반을 갖게 된 「서원」을 온상으로 한 것이며 뒤에 당쟁의 격화를 조장하는 책원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선조의 즉위와 함께 대거 요직에 등용되어 더욱 확고한 세력을 이룬다. 이들이 주위에 훈구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던 때에는 그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내부의 상호 배척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으나, 학계와 정계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자 내부의 신구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미 중앙과 지방에서 인적·물적인 지반을 가진 세력이다.
당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그 붕당으로서의 결합은 더욱 굳어, 자신은 물론 일족과 일당의 운명을 거기에 건다. 자당을 확대하고 타파를 배척하여 한번 패배하여 참혹한 추구와 박해를 당하여도 그 뿌리만은 죽지 않고 언젠가는 반대파를 보복할 정도의 조직으로 살아난다.

<김성일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당쟁은 정권을 잡고 이를 유지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권력을 잡은 당파는 곧 분열하는 경향이 많았다. 처음에 동·서인의 대립에서 동인은 남·북인으로 갈리고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갈렸으며, 그 속에서도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세분된 파당이 생기는 등, 복잡한 동향을 보이면서 말기까지 계속된다.
특히 「예송」을 정점으로 하는 복제상의 시비에 이르러서는 유학 자체가 당쟁의 도구로 이용되는데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사와 시대의 정쟁이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주의적인 실천 운동이 주었음에 비하면 근본적으로 변질되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왜란·호란과 같은 국란 가운데서도 당쟁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정치나 외교도 모두 당쟁의 와중에서 처리되었다고 한다.
그 두드러진 예로 선조23년 함께 일본에 갔던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이 일본의 정세를 보는 바가 달랐다는 점을 든다. 사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필경 병화가 있으리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할 형세를 보지 못하였다』고 반대의 관찰을 하였다. 미구에 일본의 침략이 있었으니 김성일의 보고가 잘못된 것은 억울한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일의 눈에 비친 일본의 형세가 황윤길과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당파가 달랐기 때문에 이견을 내었단 말인가. 파쟁이 격렬하던 때고 보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왜란이 일어나자 결사 보국의 뜻으로 의병을 모집하다 병사한 그의 행적으로 보아 좀 지나친 느낌이 있다.
또 서장관으로 갔던 허균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하였으며, 김성일에 수행했던 황진도 김성일의 무망을 들어 이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김성일을 적극 옹호한 선비는 바로 서당 유성룡이었다. 그는 누차에 걸쳐 이순신을 천거했던 명상으로 임란을 도맡아 해결하다시피 한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후세 사가의 판단에도 아이러니가 없지 않다.

<대중관 거의 무관>
끝으로 당쟁에 관한 우리 역사의 서술이 그쳐 써져야겠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쟁이라는 우리의 치부를 갖추자는 뜻이 아니다. 당쟁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데서 벗어나 그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가 정치사 중심이었으며 왕조시대의 정치사라면 자연히 궁중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배층에게 큰 비중이 가는 것은 어느 나라의 경우나 마찬가지지만 전체 국민의 10%도 못되는 계층의 역사가 우리 국민 전체의 생활사일 수 는 없다.
지배층의 분열이 주는 영향은 물론 지대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앙 정국에서 권력을 다투고 있는 동안에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와는 거의 무관한 상태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오늘날의 역사 서술의 방향이 이런 점을 강조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우리가 당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한 어용학자들의 과거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은 덮어놓고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어리석음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겠다.

<참석자>
박현서(한국사·한양대교수)
이종복(본사 논설위원)
차문섭(한국사·단국대교수)<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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