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미 아시아문제 전문가 「맥스·오스터리즈」씨의 방월 인상기.(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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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베트남」 남부의 새로운 경제지도를 보면 마치 표범가죽처럼 얼룩덜룩하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처음부터 인구밀도가 희박했거나 줄어든 곳들이다. 이를테면 「사이공」근처의 「쿠치」군 같은 곳은 1960년대 초에는 3만 6천명이 거주하던 곳인데 1973년에는 6백여명으로 격감됐다. 현재의 계획으로는 앞으로 2∼5년 동안 「쿠치」에 4만 8천명을 이주시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중 반수는 이전에 살다가 떠난 사람들로 충당하도록 되어있다.
남·북「베트남」사람들은 25일 전체 「베트남」을 대표하는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투표에 참가했다. 이는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해 잠정적으로 분단된 이래 통일을 위한 최초의 공식행사다. 원래는 작년에 투표에 의해 통일하기로 되어있었다. 「베트남」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20년 전에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일을 이제 치른 셈이다.
이렇게 돼서 최남단의 「카마우」반도에서부터 최북단의 「장손」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의 모든 성은 재조정되어 현재의 62개에서 34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북위 17도 선으로 갈라졌던 남북 두개의 성은 상징적으로 통합되었다.
아마 금년 중 어느 때고 새로 구성된 의회의 선포로 남북월남은 융합되어 국가적 차원의 통일이 완수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경제적인 통일은 예측할 수 없는 기간동안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전쟁기간을 통해 월남에는 「인플레」가 만연되었고 경제상태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화폐를 찍어냈다. 1「달러」에 약 7백「피아스터」를 오르내렸던 월남 「피아스터」는 「사이공」 함락전 수개월 동안에는 1「달러」에 5천 「피아스터」까지 암거래되었다. 75년 5월까지 화폐에 대한 보증은 아무 것도 없었다. 월남의 「인플레」가 월맹에까지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국은 재정 거래를 분쇄했다.
9월 들어 월남 임시혁명정부(PRG)는 월남 「피아스터」를 신 화폐로 대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누구나 5백대 1의 비율로 구 화폐 1만「피아스터」까지 신화폐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1만 「피아스터」를 초과하는 구 화폐는 출처가 증명될 때 까지 은행 특별계정에 넣도록 했다. 화폐개혁정보가 누설되자 「사이공」의 부유층은 이 계획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기발한 방법 중의 하나는 「프랑스」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었다. 1등실 환자들은 16일간 입원하는데 예치금을 내야하는데 퇴원할 때 미사용분을 신 화폐로 환불받을 수 있었다. 화폐교환 하루 전날 많은 「사이공」부자들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 교환준비가 갖추어진 후 그들은 모두 신통하게도 병이 나았고 예치금 가운데 남은 돈을 신 화폐로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화폐교환 사흘째 이미 위조지폐가 나타났다.
월남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월남화라는 말이다. 어떤 정치적·이념적 관점에서 보아도 월남은 그 정신을 교정하고 있는 중이다.
문학이나 음악분야나 심지어 일상용품 제조에서조차 월남은 내부의 자산에 눈을 돌리고 있다.
15년 전에 돗자리는 갈대로 만들었다. 그러던 것이 수입된 「플라스틱」끈으로 대체되었었다. 오늘날 돗자리는 또다시 갈대로 만들어지고 있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월남과 월맹은 일련의 기본적인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북쪽은 한 개의 국가와 공동경제체제를 이루고있고 남쪽은 시장경제체제이다. 이 두개의 경제체제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월맹은 「아시아」에서 비교적 안정된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 월남의 학교는 이제 막 다시 문이 열렸다. 이 두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공통의 생각을 갖게 할 것인가?
북쪽은 조직된 보건시설을 가지고 있다. 남쪽은 의약품의 부족에 직면해 있고 의료시설의 도시집중으로 애를 먹고있다.
보건위생의 단일체제를 바라는 국민의 소망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월맹의 주 「에너지」원은 석탄이다. 월남의 「에너지」원은 석유이고 그것은 수입되어야 한다. 월남에서 석유가 발견될 가능성이 상당히 있지만 내일의 월남은 석탄에 의존해야 할 것인가, 석유에 의존해야할 것인가, 혹은 양자에 모두 의지해야할 것인가? 이 문제만으로도 앞으로의 선택은 외국전문가의 개입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사이공」 공항이 재개된 후 첫 외국 비행기가 내린 것은 75년 6월 27일이었다. 그 비행기는 「유엔」난민 고등사무관실 소속으로 「사이공」 신 정권에 식량·의약품을 처음으로 공수해 온 것이었다. 외부세계와의 공로 재개통은 「사이공」에 처져있는 수천 명의 외국인에게 큰 안도의 기쁨을 주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공산군이 들어오기 전에 「사이공」을 떠났으나 「프랑스」인들은 남아있었다. 외교관·기업인·장기월남거주자와 수백명의 교사·기술자들이 「프랑스」 공수계획대상으로 머무르고있었다. 서구인들이 고통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일자리와 돈이 없다. 「사이공」군사위원회는 외국인 출국「비자」를 담당하는 특별 부서를 만들어 「유엔」비행기로 5백명 가량 출국시켰다.
「유엔」 공수가 끝나자 「프랑스」정부가 출국업무를 맡아 전세비행기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 비행기는 지금도 「사이공」∼「방콕」간을 주 5회 운항하는데 주목적은 외국인을 실어내는 것.
종전으로 월남은 외부세계에 문호를 다시 열었다. 월남에 「단힘·댐」을 건설한 일본 건설회사는 최근 일을 계속 하도록 월남 측으로부터 요청을 받았고 「프랑스」 해양탐사선은 월남 해상도 제작작업을 하고있다. 동시에 월남 학생들은 호주·「스위스」같은 나라에 유학을 하기 위해 파견되고 있다. 이 나라의 공산지도자들은 자국의 자원개발을 위해 서구회사들과 합작사업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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