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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가장 위험한 주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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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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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 건국 2백돌을 맞는 미국은 인류 사상 하나의 정치적 걸작임이 분명하며 사상의 거대한 나라들이 그랬듯이 갖가지 죄악과 시행 착오를 거쳐오기는 하였지만 현존 국가 가운데서 인간적인 것을 가장 많이 내포하는 민주주의의 우등생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해방 후 38선 이북이 소련군의 진주로 공산화 된데 반하여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그 영향하에 한국이란 나라가 광복되어 정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하게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본받으려 해온 것이 사실이다. 6·25동란에의 미국의 참가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월남전에 참가한 것을 정치 또는 경제적인 차원에서 공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동양적 보은 행위로 규정하려 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미국의 충고에 감사하며 독립국에 대한 내정 간섭의 인상에조차 우방으로서의 우정적인 동기만은 의심치 않으려 한 것이 역대의 한국의 어느 정부나 절대 다수 한국민에 있어서 공통되는 것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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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우리의 심정을 깔고 보더라도 「워싱턴·포스트」지 3월19일자 사설에는 생리적인 거역 반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의 하나로서 세계의 여론을 좌우한다고 자부하는 신문의 사설이 그렇게도 저차원의 감정을 노출시켜 저열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 품위를 의심치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미국을 알고 있는데 비하여 너무나 한국과 한국 민을 모르고 있는 무지로 미루어 그것은 한국에 대한 평소의 무관심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조차 생각한다.
지난 3월1일의 이른바 명동 사건의 반응으로 써진 동 사설은 이 나라의 국가 원수에 대하여 북괴 김일성 집단의 상투적인 추악한 표현을 따르고 있는 것도 문제려니와, 박 대통령을 가리켜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한국의 안정과 안보에 더 큰 해를 끼치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무지를 지나쳐 중상을 위한 비방이라고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설혹 현 정부의 각종 시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한국의 정치인이나 국민이라 하더라도 북괴의 전쟁 도발 가능성에 대한 대비로서의 안보에 관한 한 현정부의 시책에 전혀 이의가 없으며 그것이 전쟁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한국의 안정과 안보』를 도모한다는데는 3천5백만 국민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통합된 국민적 의사는 월남의 공산화 이후 더욱 절실한 실감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까닭에 3월1일의 명동 사건은 한국민 일반의 마음에 착잡한 그늘을 던지고 있으며 종전처럼 동조와 동정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건이야말로 한국의 안정과 안보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마저 갖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우려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현실로 나타났다. 바로 그것이 「워싱턴·포스트」지의 반응인 동 사설의 주장이며, 그 주장이 미국민에게 준 악영향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한국의 안정과 안보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존재는 어느 누구도 명동 사건 조차도 아니며 그릇된 선입견에서 사실을 깊이 살피지도 않고 감정적으로 흥분함으로써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킨 「워싱턴·포스트」지의 바로 그 사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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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0년 한국이 줄곧 본보기로 해온 미국이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도처에서 그 선의가 그릇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대하여 탄식을 불금 하는 우리는 그 한가지 원인을 알고있다.
그것은 양성적인 일부의 미국인이 자기의 민주주의 정치와 군사적·경제적 강대성을 자신하는 나머지 다른 나라의 역사와 사회 현실과 지혜와 인심을 깊이 연구하려 하지 않고 타국의 사상을 자기의 척도로 재고 자기 취향에 맞는 인물에만 관심을 갖는 까닭에 현장에 맞지 않는 「돈·키호테」적 언동을 자행하기 때문이다.
명동 사건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지의 이 사설도 일단 그와 궤를 같이하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사건을 일으키는 정치인과 종교인을 높이 평가하고 동석하는 원칙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시킬 때 폐단이 빗나가는 것을 생각지 않는 「워싱턴·포스트」 사설이라면, 우리는 그 권위를 위하여 그 발상법이 너무나 단순함을 슬퍼한다.
월남 공산화의 양인이 국민과 거인의 전의 상실에 있었고 그것을 부채질한 것이 일부 종교 인사들의 적전 인권 논쟁에 있었다 함은 이미 사실로써 입증되고 있다. 이것이 찬양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한국민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는 용기를 동지 사설은 덮어놓고 정부에 대항하는 정치 행동에서만 발견하려는 모양이나, 그것은 견실한 대다수 한국민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 있어서 현재나 미래에 필요한 용기는 국가 안보와 사회 발전을 위하여 자기가 선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위대한 평범에 있다고 믿는다.
일단 유사시에 총을 들고 싸워 이 나라를 지킬 사람은 과연 전자이겠는가 후자이겠는가.
우리는 공산화된 「아시아」 대륙의 일각에서 비공산주의적 생활 양식을 향유하고 그것을 자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죽느냐 사느냐의 결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일에 동요하지 않는 침착한 국민이며, 강한 지도자이다.
강한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국민이 자율적으로 단결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는 지탱되지 못한다. 만약 그러한 상황을 「무자비한」 지도자의 탄압에 의한 부정적이며 타율적인 질서로 본다면, 그것은 본말전도의 큰 잘못이다. 「샌터클러즈」 할아버지 같은 지도자와 양말 속의 선물을 좋아하는 따위의 국민으로써 이 방공제일선의 나라가 어떻게 지켜질 것으로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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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워싱턴·포스트」지 사설 필자에게 그 논리의 도착을 지적하려 한다.
그것은 한국 정부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은근히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제약하도록 행정부와 국회에 종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할 때 현정권만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피해는 먼저 한국민의 생활에 오고 결과적으로는 한국이란 나라 자체에 미친다. 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주장인가.
게다가 정권적 차원에서 원조를 들먹거리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 감정을 크게 해치는 것이어서 오히려 그것은 그 의도와는 달리 정부와 국민을 결속시킨다는 것을 사례가 증명하고 있는 터이다.
「워싱턴·포스트」 사설의 그 주장이 한가지 한국민에게 유익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원조 받는 국민으로서의 모욕감에서 경제적 자립을 서두르게 하는 자극제가 되어 한국민을 분발시키는 일일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지배적 거리는 멀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로 우리는 미국을 생각하고 있고, 미국민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선의에 찬 국민으로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극소수 일부 논객의 자의적인 논의 때문에 이와 같은 국민적 신뢰와 국가간의 신의가 무너질 수는 없다.
다만 일부 논객의 허명을 위한 소재로 한국이 악용되는 것을 엄중하게 경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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