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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그것은 우리의 비통한 역사를 일깨워주는 전율의 광경이었다. 살벌한 일본군인들의 총칼에 휩싸여 이끌려 가는 윤봉길 의사는 그래도 무엇을 절규하고 있었다.
피가 낭자한 그의 얼굴은 오히려「성난 사자」의 모습이었다. 어제 본지에 실렸던 그 한장의 사진은 실로 혈사의 한「페이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2년4월29일. 상해의 하늘은 몹시 흐려있었다.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장절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다. 일본이 상해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그날 아침 윤봉길 청년은 백범 김구선생과 조찬을 했다. 백범은『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고 윤 의사의 인상을 말한 일이 있었다.
윤 의사는 이미 그 2년 전인 1930년2월 23세의 나이로 중국에 망명했다. 고향(예산)에서의 농촌계몽만으로는 자신의 사명을 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망명 지에서 세탁소를 경영하는 등 비분의 날을 보냈었다. 그러나 백범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면서 기어이 자신이 할 일을 찾게 되었다.
윤 의사는 왕웅(김홍일 장군)을 통해 물통폭탄을 구해놓고 있었다. 그날은 홍구공원에 궂은 비가 후둑후둑 내렸다.
윤 의사는 도시락과 물통을 가장하고 기념식장에 들어갔다. 마침내「전원 묵도」를 하는 중 에 그는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그 자리에는 일본의 상해파견군사령관인 백천의칙 대장과 상해 거류민 단장인 하단정차, 주중공사 중광규, 그리고 일본 장성 등 6명이 묵도를 하고 있었다. 하단은 현장에서 폭사하고 백천대장도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밖에도 모두 중상을 면치 못했다.
윤 의사는 그후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19일 총살형을 받았다. 무려 26발의 총탄을 받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한마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종에게 주는 말이었다.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라…』
역사는 언제나 좋은 교훈을 남긴다. 그때 홍구공원의 단상에 있었던 중광공사는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외무대신이 되어 있었다..그는 1945년9월2일 동경만의「미주리」함상에서 일본의 전권위원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한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폭탄에 맞아 불구가 된 발을 이끌고 그 자리에 나왔었다.
새삼 윤 의사의 거사사진을 보며 역사의 기묘한 전환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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