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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 벽화서 신라인 모습 첫 발견|김원룡 박사가 입수한 사마르칸드 보고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앙 「아시아」에 1천3백년전 신라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련안의 중앙 「아시아」인 「우즈베크」 공화국 수도 「사마르칸드」시 구성지의 채색 벽화 가운데 서기 8백년께의 한국인 두 사람이 의관을 정제하고 나타난 것이다.
서울대 김원룡 박물관장은 최근 「사마르칸드」 유적의 발굴 보고서를 입수했다고 밝히고 그곳 옛 궁궐 벽면에 그려진 외국 사절도 속에 한국의 사절도 포함 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서역 지방에서 한국인의 자취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특히 극채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돼 있어 당시 복식 연구에도 귀한 자료로 지목 돼고 있다. 소련의 중앙 「아시아」 전문가인 「L·I·알리바움」 교수가 75년 소련에서 발간한 『「아프라샤브」의 회화』는 그가 직접 참가한 「사마르칸드」 유적에 대한 보고서.
이 보고서에서 극동인이라고, 설명한 한국인은 머리에 두개의 뿔이 솟은 모자를 쓰고 앞섶을 트지 않은 반 「코트」식 웃옷에 허리띠를 매었고 바지를 입었다. 관은 회색이고 얼굴은 적황색이며 옷은 황토색 (l2∼17등의 하급 관리 옷). 띠와 칼은 흑색이다. 관에는 홍색의 구슬을 둘렀는데 귀고리가 없고 한국 특유의 환두도를 차고 있다.
이 인물도는 구성지의 내성 23지점에 속하는 방형궁 1실 서쪽 벽에 기다랗게 가뜩 그린 인근 여러 나라 사신의 행렬도의 한 부분. 「알리바움」 교수는 이들 벽화가 7세기말∼8세기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혔다.
「카스피」해와 천산 산맥 중간에 위치한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한 중심지. 서역 문화가 중국에 수입되는 전초 기지로서 동으로 중국·몽고와 연결되고 남으로 인도와 「페르샤」에 접했다. 서쪽으론 「터키」를 비롯해 중동 여러 지역에 통하는 교통과 문화 전파의 요새다.
이 고장은 BC5세기까지 「이란」문화권에 속했으나 BC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을 받았고 BC2세기에 인도 「스키타이」족에 의해 대월씨국이 건설됐다. 기원 후 6세기에는 「터키」의 작은 속국이었고 8세기초에 「아랍」인이 정복해 「티무르」 제국을 세웠다. 그후 13세기에 몽고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폐허가 돼 버렸다. 동서 1·5km나 뻗친 이곳 궁성 유적은 BC4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것인데 한국인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아랍」인의 침공 직전의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통일직 후. 곧 신라는 6천km 이상 떨어진 「사마르칸드」에 사절을 파견했음이 입증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교역을 위한 적극적인 수용 자세로 해석되며 한반도의 동남에 위치했던 신라가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실마리로 파악되고 있다. 신라 유물 가운데 보이는 서역 물건은 중국을 통해 들여온 것만이 아니고 그러한 사절 왕래에도 적잖이 지니고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는 진덕여왕 2년 (649년)에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어 당의 의제를 받아들였고 이어 문무왕 4년 (664년)엔 부인복까지 당제와 같이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개혁된 의제는 중국 복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한국 의복의 특색만은 그대로 살려 부분적으로 개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당 이현 묘 (708년)에서 발견된 신라인의 복색은 뿔 솟은 복두를 쓰고 도포 같은 고식의 옷차림이다. 이에 비하여 「사마르칸드」의 신라인은 관과 옷깃 (월령)에 약간 차이가 있다고 김 박사는 벽화는 통일신라가 먼 나라에 문화 사절을 파견한 점과 복제 개혁의 내용 등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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