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개는 금지' 260년 만에 … 성차별 허무는 골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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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자 로레나 오초아(멕시코)가 이 대회 마지막 날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 18번 홀에서 ‘금녀의 집’으로 알려진 클럽하우스 방향으로 티샷을 하고 있다. 올드코스에서 여성들의 골프 경기를 허용한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세인트앤드루스 AP=뉴시스]

20년 전만 해도 클럽하우스 앞에 ‘개와 여성은 출입 금지(No dogs or women allowed)’란 푯말이 붙었던 골프의 발상지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이 9월 18일 2500명가량의 엘리트 남성 회원을 대상으로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할지 투표한다. 3분의 2가 동의한다면 1754년 설립된 영국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로열에이션트 골프클럽(R&A)에 260년 만의 첫 여성 회원이 생긴다.

 R&A는 26일(현지시간) 회원들에게 “이젠 여성도 회원으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 물론 규정 변경 여부는 회원들이 결정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R&A 대변인은 “우린 강하게 규정 변경을 바라고 있으며 회원들도 이를 지지해 줄 것으로 믿는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R&A의 피터 도슨 회장은 “회원들 반응은 아주 긍정적”이라며 “사회가 바뀌는 만큼 우리도 한 걸음 내디딜 때가 됐다”고 말했다.

 남성 회원 전용정책을 고수하는 명문 골프장에 대한 다방면의 압박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 오거스타내셔널골프클럽은 2002년 여성단체로부터 성차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거스타는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마스터스를 여는 곳이다. 당시 오거스타는 “우린 남성들만의 사교모임 장소”라고 맞섰으나 결국 2012년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투자회사 레인워터의 파트너인 금융인 달라 무어 등 두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영국도 달아올랐다. 메이저대회인 디오픈이 열리는 9곳 골프장 중 4곳이 남성 전용 회원제를 택하고 있어서다. 세인트앤드루스 외에도 뮤어필드, 로열세인트조지스, 로열트룬 등이다. 세인트앤드루스는 2007년 브리티시 여자오픈을 개최하며 여성에게 처음으로 개방했다. 당시 우승자인 로레나 오초아가 “여자는 올 수 없는 곳으로 알았던 이곳에서 우승을 한다면 더 없는 영광이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밝힐 정도였다. 그러나 오거스타와 달리 세인트앤드루스가 여성 회원을 허용하지 않자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가 “오거스타는 된다는데 R&A는 왜 안 된다고 하느냐”고 비판했다. 지난해 디오픈이 열린 뮤어필드에선 항의성 불참 행렬이 이어졌다. 골프광으로 알려진 앨릭스 샐먼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도 뮤어필드를 외면했다.

 세인트앤드루스는 지난해까지도 “오거스타와 R&A의 정책이 같을 수 없다”곤 했었다. 그러다가 몇 달 만에 180도 달라진 건 몇 가지 요인이 중첩됐기 때문이다. 세인트앤드루스는 내년에 디오픈을 연다. 기존 정책을 유지한다면 뮤어필드 이상의 정치·사회·경제적 압박을 받을 게 뻔하다. 다국적 은행인 HSBC의 스폰서 업무 책임자인 가일스 모건은 “R&A의 입장이 은행으로선 굉장히 불편하다”고 비판했다.

 세인트앤드루스 자체의 필요성도 있었다. 골프가 2016년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 도슨 회장 등 R&A의 역할이 컸다. 그런 R&A가 성차별 논란에 휩싸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제 시선은 나머지 3곳을 향하게 됐다. 당장 뮤어필드부터 “검토 중”이란 입장을 밝혔다. 영국 더타임스는 “뮤어필드가 R&A를 뒤따를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라며 “엄청난 변화”라고 해석했다. 다른 두 곳 골프장도 결국엔 남성 전용정책을 폐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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