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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의 시장 실험 … 1조9000억 달러 부실 뇌관 해체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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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6일 중국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의 저축은행 급인 장쑤(江蘇)성 서양(射陽)농촌상업은행 앞에 예금자들이 장사진을 쳤다. 19세기형 예금인출사태(Bank Run)였다. 인터넷뱅킹이 일상화된 요즘엔 예금자들이 문전에 몰려드는 일은 극히 드물다. 로이터통신은 “공포가 사흘간 뱅크런을 일으켰다”고 이날 전했다. 바로 파산·부도·퇴출의 두려움이다. 중국인들이 사회주의 체제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1994년 개혁·개방 이후에도 실감하지 못한 공포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불을 댕겼다. 그는 올해 초“경제를 시장화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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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커창은 말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달엔 차오르솔라에너지가 파산하도록 내버려 뒀다. 말과 행동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후 시장엔 파산의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중엔 ‘살생부’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여기다 저축은행 급이긴 해도 금융회사에마저 뱅크런 사태가 번지자 중앙은행인 인민은행(PBOC)이 나섰다. 서둘러 자금을 주입해 진정시켰다. 그러나 파산의 두려움은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27일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중국 기업들을 파산으로 모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인민은행이 지속적으로 돈을 빨아들이고 있어서다. 그 바람에 최우량 회사채 금리가 연 6%를 웃돌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이 금리가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쪽이다. 리커창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벌인 셈이다.

 이제 관심은 리커창의 ‘시장화가 순탄하게 진행될 것인가’ 여부다. 역사적 경험은 리커창 편이 아니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맥킨지 회장인 도미니크 바튼의 분석에 따르면 80년 이후 발생한 주요 위기는 대부분 시장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금융 부실 처리가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아서다.

 실제 부실자산 처리는 시장화의 전제조건이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은 80년대 부실기업 정리 경험을 바탕으로 “무수익대출(NPL)을 처리하지 않은 채 시장화나 개방화가 순조롭게 이뤄질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리커창 앞엔 어떤 부실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대표적인 게 투자신탁펀드의 구조화(Structured)된 자산이다. 지난해 말 현재 1조9000억 달러(약 2033조원)에 이른다. 미 금융그룹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분석에 따르면 이 신탁자산의 출발점은 시중은행들이 지방정부가 설립한 공기업이나 민간기업, 건설회사 등에 꿔 준 돈이다. 요즘 실적이 나빠지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BOA는 “중국 정부가 부실자산을 낮추라고 지시하자 은행들이 문제의 대출(채권)을 투자신탁에 팔아 넘겼다”며 “투자신탁은 이런 채권을 뒤섞어 새로운 자산으로 만든 뒤(구조화) 투자자들에게 되팔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투자은행들이 금융위기 이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를 사들여 구조화한 뒤 투자자들에게 판 수법과 닮은꼴이다.

 차오르솔라 부도 이전까지 펀드 투자자들은 은행 금리보다 높은 수익에 만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방공사나 일반기업, 건설회사가 돈을 갚지 못하면 충격이 구조화 연쇄고리를 타고 투자신탁펀드의 투자자들에게 전달된다”고 전했다.

 문제는 도미노 가능성이다. 한 회사가 부도나면 구조화된 펀드에 들어 있는 다른 기업의 채권 가격마저 폭락할 수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 정부의 개입에도 금융 시스템 위기로 번진 이유다. 더욱이 중국의 투자신탁펀드(1조9000억 달러)는 구조화된 미국의 서브프라임 증권(2007년 당시 9000억 달러)보다 두 배 이상 규모가 크다. 리커창이 부실을 정리하다 자칫하면 덧날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단 사공일 이사장은 "중국 경제 정책 담당자들이 현명하게 부실자산을 정리해 나갈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채권 구조화=은행이 보유한 대출금이나 유가증권, 일반기업의 매출 채권(외상) 등을 섞어 재분류한 뒤 새로운 증권으로 발행하는 금융기법이다. 은행이나 기업은 대출금 등에 묶인 돈을 현금화해 재대출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투자자는 높은 금리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위기가 시작되면 파장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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