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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출현한 거대 UFO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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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서기 2014년 3월 21일, 서울 중구 을지로 7가. 거대한 은빛 금속체가 출현했다. 4만5133장의 알루미늄판으로 구성된 납작항아리. 직선과 기둥이 없는, 한반도에서 목격된 적이 없는 물체다. 면적만 3만3000여㎡(1만 평). 집회인원 추정방식으로 치면 8만 명이 들어가는 크기다. 곡선형 물체로는 지구에서 가장 큰 놈이다. 그 앞에서 시민들이 품평을 한다.

 “외계 혹성에 온 느낌.” “온통 곡선, 멀미 나네.”

 “근데, 뭐하는 데 쓰는 물건이지?”

 놀이동산, 전시장, 컨벤션센터…. 일물일어(一物一語)라면 미확인비행물체(UFO)가 가장 맞는 표현이다. 전문가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디자인경영으로 유명한 한 CEO는 “용도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한 시민단체가 이 물체를 두고 공개 토론회를 열었는데, 주제발표 제목이 도발적이다. ‘괴물에 대해-.’ 이 자리에서 “독불장군의 표본” “4대 강과 판박이”라는 혹평이 나왔다.

 서울시는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리는(Play) 곳’이라고 홍보한다. 소수지만 어떤 건축가들은 “새로운 지평” “첨단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한다. 일부 언론은 “디자인계의 카네기홀, 파리의 퐁피두센터로 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는다. 건국 이래 한 건축물을 놓고 이렇게 뜨거운 ‘썰전’이 벌어진 경우가 있을까. 악마·천사론의 씨앗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탄생 과정에서 생겨났다.

 을지로 7가는 조선 훈련도감 분영이 있던 곳이다. 일제는 이곳에 육상경기장·야구장을 세웠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후보는 ‘동대문 문화공원 프로젝트’ 공약을 밝힌다. 당선 이후 그는 공원보다는 ‘월드클래스’급 디자인플라자를 택한다. 서울의 밀라노를 꿈꾼다. 설계도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에게 맡긴다.

 공공건축은 민간건축과 달리 뚜렷한 사회적 요구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두고 여러 사람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동대문 UFO는 그곳에, 그런 건축을 해달라는 절절한 사회적 바람이 없었다. 계획에서 설계확정까지 1년도 안 걸렸다. 야구인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나섰다. 공사 도중 유적·유물이 나오자 사학계도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주변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막 건축’, 똬리를 튼 은빛 아나콘다라는 비판이 국내 건축계에서 나왔다. 악마·천사론과 UFO 정체설은 이런 흐름 속에서 생겼다.

 적어도 오 전 시장은 방향을 잡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가 무상복지의 풍랑에 휩쓸려 물러나면서 동대문은 더욱 길을 잃게 된다. 이미 공사비가 당초의 2배인 5000억원까지 치솟고 매년 300억원 이상을 써야 하는 ‘세금 하마’ 진단도 나온 터였다. 보궐선거를 거쳐 이를 이어받은 박원순 시장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돌이킬 수는 없었다. 골격은 이미 다 올라간 상태였다.

 미래는 열려 있는 시간대다. 과거·현재와 달리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어떤 의지를 갖느냐에 따라 여러 길이 나온다. 동대문 UFO는 ‘미래적 건물’이다. 모양과 용도가 비(非)정형이다. 우리가 UFO를 외계로 날려보낼 수 없다면 바람직한 활용전략을 짜야 한다. 서울시청 신청사의 외형을 두고도 말이 많았지만 시민에게 개방하면서 합격점을 받지 않았는가. 개관전에 간송미술관의 훈민정음해례본(국보)과 단오풍정을 선보인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내용물에 따라 악마도 얼마든지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다.

 이제 천사론자와 악마론자는 서로를 품을 때가 됐다. 미래를 잊지 말자. 주변 영세상가와 봉제공장을 UFO와 연결해 세계 어디에도 없는 패션메카를 만드는 데 힘을 쏟자. 과거도 잊지 말자. 출현과정의 문제점과 디자인 혹평까지 담은 알림방을 한가운데에 만드는 건 어떨까. 그곳에서 우리 공공건축의 장래를 놓고 ‘썰전’을 하자. 이게 넉넉한 미래 아닌가.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