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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가족'] 내 남편은 마마보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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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그러니까, 나중에 하자고.”

일요일 오후,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고 있는 남편에게 성화를 냈다. 애라도 데리고 근처 놀이터라도 다녀오면 좋을 텐데. 주말만 되면 이 남자는 도대체 침대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깨어있는 시간이면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도무지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 그나마 대화가 이뤄지는 시간은 딱 한번. 집 근처 시댁이다. 집에선 그렇게 조용하기 짝이 없는 남편이지만, 시댁에 가면 쉴 새 없이 떠든다. 직장 상사의 뒷담화부터, 요즘 집값에 정치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모자(母子)는 쿵짝도 잘 맞아 TV를 보든, 식탁 머리에 앉든 대화에 대화를 이어간다.

반면 나는 시댁에 가면 말문이 닫힌다. 시댁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을 잘못했다간 비아냥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애 키우기 힘들다”고 하면 “밖에 나가 돈벌어오는 네 남편에 비하면 그건 천국이다”라는 소리가 돌아온다. “애가 좀 크면 취직을 할까 봐요”라고 하면 “집에서 애나 보던 여자를 누가 쓰냐”고 타박을 놓는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가 이렇진 않았다. 애초 남편을 소개시켜 준 사람이 시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시어머니는 “우리 아들 한번 만나보라”며 극구 권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기업에 다닌다”며 나를 볼 때마다 아들 자랑을 늘어놨다. 시어머니의 소개로 만난 자리에서 남자는 꽤 적극적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연봉이며, 취미생활이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첫 만남 이후로 남편의 연락이 잦아졌고, 우리는 5개월만에 결혼을 하게 됐다.

신접살림은 시댁 근처에 꾸렸다. 주중엔 시댁에서 같이 지내고, 주말엔 신혼집에서 살면서 두집살림을 이어갔다. 친구들은 “왜 그렇게 사느냐, 불편하지 않느냐”며 측은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만 잘하면 시댁살이쯤은 별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일년에 한번 응급실 가는 남편

결혼 후 일년쯤 되었을 때 일이었다. 한밤 중 남편이 몸부림을 쳤다. 불을 켜보니, 남편의 눈이 돌아가 있었다. 괴성을 지르는 남편. 아무리 흔들어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남편은 결국 응급실로 실려갔다. 남편 곁에서 꼬박 밤을 새고도 왜 남편이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은 후에야 병원에선 남편이 간질을 앓고 있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온 남편은 멀쩡했지만, 그 일 이후로 많은 게 달라졌다.

남편에게 간질이 있다는 사실을 시어머니는 모른 척했다. 하지만 퇴원하고부터 못박는 일 조차도 “우리 애가 몸이 약하니 시키지 마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상을 옮기는 일이나 운전,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내 차지였다. 남편은 ‘허약하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을 시킬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고는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이 더 극진해졌다. “밤마다 깨고 보채는 아이 때문에 ‘우리 아들’이 잠을 못 자면 안 된다”며 시어머니는 내가 몸조리하는 한 달간 남편을 시댁에서 지내도록 했다. 조리가 끝나고 나서도 시어머니는 다른 방에서 아이와 내가 단 둘이 따로 지내야 한다고 우겼다. 남편은 출근해 시댁에 들렀다가 퇴근할 때도 시댁에 먼저 갔다. 우리 집에오는 건 밤 11시가 훌쩍 지난 늦은 시간이었다.

당신 삶의 우선 순위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시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건 내가 아이를 낳고 석 달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담도암 진단을 받은 시아버지는 날로 병색이 짙어졌다. 지근에 살았지만, 아직 어린 애까지 데리고 두집을 오가며 병수발을 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댁으로 들어가 살며 시아버지를 모시면 한결 부담이 덜할 것 같았다. 간혹 손이 비는 어머니가 애를 봐주실 수도 있고 하니,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 판단은 틀렸다. 아버님은 암치료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어머님은 나날이 예민해져갔다. 그만큼 잔소리도 늘어서, “집안 치운지가 얼마나 된 거냐. 집에서 뭐하는 거니”부터 “음식 간이 하나도 안맞다”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간혹 “니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통에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런 거다”라는 소리를 뒷통수에 대고 하실 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내가 남편보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못마땅해 하셨다. “여자가 좋은 대학 나와봤자다. 결혼해서 살림하는 데 대학이 필요 없다”고 했다. 남편이 없는 낮 시간에 아예 “야!”를 입에 달고 살았다. 누구 애미야, 누구야 하고 이름을 불러줘도 좋으련만, 어머니는 나를 함부로 대하며 본인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하소연도 해봤다. 눈물바람을 하며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아 봐도 남편은 “우리 엄마가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오해한 거다”라며 어머니 편을 들었다. 남편에겐 엄마가 늘 먼저였다. 참다 못해 한번은 “따로 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남편은 나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시어머니와 부동산을 찾아 집을 덜컥 계약했다. 그것도 시댁에서 걸어서 몇분 채 되지 않는 집이어서 분가랄 게 의미가 없었다. 두달 뒤 우리는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남편은 이사한 날 이삿짐도 풀지 않고 시댁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사를 한 지 한 달 만에 아버님은 세상을 뜨셨다. 남편은 예상보다 빨리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혼자 남게 된 어머님 걱정이 컸다.
“여보 당분간 어머님네에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자고 올게.”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다음날 남편은 통보를 하듯 말했다. 집도 걸어서 얼마 되지 않는데, 굳이 남편만 시댁에서 자고 올 필요는 없었다. “자주 들여다보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남편은 되레 화를 냈다. 그리고 얼마 뒤 남편은 평소 연락도 않고 지내던 형부를 찾아갔다. 그는 형부에게 “아무래도 아내가 아버지 유산을 탐내 들어와 살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본색이 드러난다.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 일로 우리는 크게 싸웠고, 남편은 어머님 댁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건 뭐니

노력도 해봤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우리 식구끼리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남편을 만나 “우리 잘 해보자”며 가족여행을 청했다. 복닥거리는 집을 떠나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면, 남편과 사이가 좀 달라질 것만 같았다. 여행을 다녀오고 몇 달간은 사이가 좋아지는 듯 했다. 주말 아이 장난감을 치우고 있는데 TV를 보는 남편이 너무 원망스러워보였다.

“당신 엄마는 내가 당신 종 노릇 하라고 결혼시킨 것 같아.”

무심코 던진 말에 남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집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잡아도 봤지만, 남편은 그 후로 두달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이 돌이 지나 일을 구하게 되자, 시어머니는 “정을 떼라”고 했다. 아이 엄마더러 정을 떼라고 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사이는 그 뒤로 악화일로를 걸었다. 남편은 맘대로 밤늦도록 술을 먹고 들어왔고, 부부싸움도 격해져 경찰을 부르고서야 일단락이 될 정도가 됐다. 남편은 이혼 서류를 들고 내 직장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봤지만 남는 건 결국 이혼 서류 몇장 뿐인 셈이었다.

법원 “재산분할 남편 55%, 아내 45%로 정해야”

남편은 아내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길 거부하자 변호사를 고용했다. 참다못한 아내 역시 맞소송을 냈다. 남편은 재판에서도 아내 탓을 했다. “암에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예민한 시어머니를 외면했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에게 끊임없이 대들고, 분가와 이혼을 요구한 건 아내였다”는 주장이었다.

서울가정법원은 “남편의 이혼 요구는 부당하다”고 봤다. 하지만 “아내가 이혼을 원하고 있고, 두 사람의 혼인관계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며 이혼을 선고했다. 법원은 부부관계 악화의 원인자로 남편을 꼽았다. 남편이 평소 간질을 앓고 있었는데, 결혼 전에 아내에게 이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는데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내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생활을 하지 못하면서 부부간 동거의무를 해태했고, 폭언을 하는 어머니로부터 아내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아내에게 위자료로 3000만원을 보상하라”며 아내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두 사람이 재산을 각각 남편 55%, 아내 45%로 나눠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내가 결혼 전 오피스텔을 구입해 살고 있었는데, 이 돈을 결혼 초기 자금으로 보탠 데다 아내가 아이를 양육하게 된 점을 감안했다. 친권과 양육권을 갖게 된 아내는 법원의 판결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매달 100만원을 양육비조로 받을 수 있게 됐다. 법원은 남편에겐 적극적인 아이 면접권을 인정해줬다. 한 달에 2~3회에 걸쳐 하룻밤을 아이와 같이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전화나 이메일 편지, 선물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도록 명시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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