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상)유일하기 성공한 한국인 농장|교포 대 다수는 상파울루거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브라질」집단이민이 시작된 지 이제10년을 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이 10년 동안 정든 고향을 떠나 낮선 남미대륙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광막한 토지, 무진장에 가까운 천연자원을 가진 아직도 미지의 세계인 남미대륙은 비록 짧기는 하지만 우리의 이민 개척사를 통해 이제 한국인에겐 전혀 생소한 곳만은 아니다. 남미대륙에 닻을 내린 1만5천여명에 달하는 한국교포들은 그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이겨냈고 당초의 농업이민이 성공을 거두었건 실패를 했건 이제 이 땅에 한국인사회를 건설,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음은「브라질」이민 10주년을 계기로 본사「상파울루」주재 허준 통신원이 농업이민의 성공한 예로 꼽히는「산타마리아」한인농장을 방문, 취재한 정착현황과 현지 농부들의 좌담회 내용이다. <편집자주>
「브라질」에의 한국인 집단농업이민은 세차례가 된다. 63년의 서울농장·아리랑농장과 64년의「빅토리아」농장이민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66년에 실현된 이른바「가톨릭」이민의 일부가 당초의 계약에 따라 농업이민으로서 성공한 유일한「케이스」다.
「상파울루」시에서 남쪽으로 6백여km떨어져「브라질」의 남부곡창지대인「마라나」주의 농산물집산지「폰타그로사」시가 있고, 여기서 다시 30여km를 더가면「하이웨이」연변에 「콜로니아 ·산타마리아·코레아노스」(「산타마리아」한국이민촌) 란 커다란 푯말이 세워져있다.
「하이웨이」연변 14km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는 이농장의 규모는 한국식농업의 사고방식으로는 약간 짐작하기 힘든다. 바다의 큰 파도와 같은 구름이 끝없이 전개되는 곳곳에 밀을 추수하는「트랙터」만이 멀리 조그맣게 시야에 들어온다.

<3월에 10주년 행사>
현재 한국교포 11가구가 밀·콩·과수·소채등의 농사와 양계를 하면서 주변사람들로부터『성실하고 신용있는 한국인』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다. 4백여만평에 달하는 이 농장은 지난 71년부터 이곳「파라나」주가 공식으로 발행한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있다.
「산타마리아」농장에는 지난 66년1월부터 세차례로 나누어 한국이민 69가구 5백14명이 일단 정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다나은 살길을 찾아「상파울루」등 도시로 나가고 지금까지 이 농장을 지켜오고 있는 교포는 11가구뿐이다.
「산타마리아」농장은 76년1월로 이민10주년을 맞이했다. 그래서 현지 교포들과「브라질」주재 한국대사관·「상파울루」한국총영사관에서는 오는 3월 합동으로 기념식을 가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송찬호「브라질」주재대사와 문희철「상파울루」 총령사가 농장을 찾아 교포들을 위로 격려하는 한편 오늘의「산타마리아」농장이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인 도움을 준「폰타그로사」교구의「돈· 제랄드」주교에게 감삿장을 주었다. 62년 몇몇 사람이 개인적으로「브라질」이민을 추진했으나 개인의 힘으로는 잘 진척
필수가 없었다. 마침 이들이 모두「가톨릭」신자들이어서 서울명동성당에 의뢰하여 이른바 「가톨릭」이민으로 주선을 부탁했다.
명동성당측에서는 62년「바티칸」제2차 공의회가「로마」에서 열리는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우기남대주교가 「브라질」「파라나」주의「돈·제랄드」주교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민의 뜻을 전담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이민을 위해서는 현지에 농지를 확보해야 하고 이민들이 살집이라든가 농기구등 농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준비가 선행돼야했기 때문에 그리 쉽게 진전이 되기가 어려웠다.
당초「가톨릭」이민은 1백50가구를 계획, 농지구입·여비등의 비용으로 당시 돈으로 가구당 40만원씩을 거두기로 했다. 그러나 가입금을 낸 사람은 1백30가구였다. 이 돈으로 윤을수신부가「브라질」로 건너가「돈·제랄드」주교와 협의하여 당시의 싯가로는 좀 비싸다고 할 수 있는 1「알켈」(1알켈=2·42ha=7천2백평)에 1백「크루제이로」(당시 환율은「브라질」화 2「크루케이로」가 미화1「달러」)씩 주고 6백20「알켈」농지를 현재의「산타마리아」농장땅으로 구입했다.

<제3국으로 떠나기도>
국내에서는 별도로 이민추진단체로「산타마리아」개발공사가 설립돼 국내수속을 맡았다. 땅은 샀지만「브라질」정부의 이민허가와 이에 필요한 절차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민추진 2년만인 64년말에 정식 이민허가가 나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속이 시작됐다.
당시 한국에는「브라질」상주공관이 없었기 때문에 수속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본「고오베」에서「브라질」이민관(영사)을 서울로 데려와서 신체검사·「비자」수속등을 해야했다. 이민수속은 65년 10월말께 모두 완료됐지만 막상 신체검사에서 53가구만 합격을 해서 나머지 80가구분은 가입금을 되돌려 주어야하는 문제도 생겼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가톨릭」이민은 세차례에 걸쳐 모두 69가구 5백14명이「브라질」로 이주했다.
1차이민 53가구 3백80명은 65년11월17일 부산에서「네덜란드」선박(객·화물겸용)「치자렌가」호에 올랐다. 당시 이 배에는「브라질」행 이민이외에도「파라과이」「볼리비아」등으로 가는 이민을 합해 모두 6백여명이 함게 탔다. 이민선은「홍콩」인도양「아프리카」남단을 거쳐 약2개월만인 66년1월초「브라질」의「리오데자네이로」항에 도착했다.
60년대 초의 이민「붐」을 타고 희망과 불안을 같이 안은 채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남미에 발을 디딘 이들은 언어·기후·생활관습등이 모두 다른 악조건 속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해 여기에 한국인사회를 건설한 개척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10여년의 짧은 시일에 그런대로 기반을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있는 사람도 많지만 상대적으로는 아직도 어려운 형편의 교포도 많고, 또 이곳생활을 견디지 못해 미국이나「캐나다」등 북미주의 제3국으로 다시 떠난 사람도 상당수 된다.

<브라질 교포는 만여명>
현재 남미대륙에 정착한 l만5천여명의 한국교포는「브라질」에 l만여명이 살고있고, 「아르헨티나」에 2천2백여명,「파라과이」엔 최근 숫자가 늘어 2천5백여명. 그리고「볼리비아」 등 몇 나라에 1천여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남미이민의 대표적「케이스」는 역시「브라질」이다. 현재「브라질」의 한국교포는 1만여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숫자는 대체적인 추산에 불과하고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처음부터「브라질」행 이민절차를 밟고 건너온 사람 이외에도「파라과이」「볼리비아」등 제3국을 거쳐 이곳에 정착한 사람이 많아 현지「상파울루」총영사관이나 교민회등에도 제대로 등록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질」에 있는 한국인의 대부분은 집단농업이민으로 온 사람들이며 이들은 처음 이민을 떠날 때 3년간은 농업에 종사한다는 계약서를 쓰고 이곳에 왔다. 그러나 지금은「브라질」교포의 90%가 대도시「상파울루」에 몰려있다. 3년간의 계약기간을 끝낸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은 그전에 도시로 뛰쳐나갔고,「브라질」에 오자마자 한번 농장을 밟아보지도 않고 도시로 나온 사람도 상당수다.
한마디로 한국의 농업이민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이것은 물론 각오가 든든해야할 이민당사자들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현지 사정에 대한 충분한 사전조사와 준비등 종합적인 계획 아래 장기적 안목으로 이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내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무계획한 이민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이민을 기민하듯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고 이 때문에 현재 한국이민은「브라질」정부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상업·제조업많고>
우리 교포의 90% 이상이 모여 사는「상파울루」시는 남미 최대의 도시이자「브라질」상공업의 중심지다. 인구는 6백만명이 좀 넘고 주변에 연결된 위성도시까지 포함한 대「상파울루」권의 인구는 1천만명에 육박한다.「상파울루」시의 자동차만 1백50만대에 이르고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돈 많은 사람들만이 탈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에 속하는 것 하나만 보아도 경제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브라질」교포들은「상파울루」시내에서도 동양인촌(엄격히 말해 일본인촌이다)이라고 불리는「리베르다지」구의 한쪽 지역에서 주로 산다. 이들의 생업은 의류의 생산·판매등 중소 제조업이거나 상업이다.
이 동양인촌은「상파울루」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아파트」값이 싸기 때문에 갓 이민 온 사람들에겐 여러 가지로 정착하기에 손쉬운 반면 우범지역의 하나라는 데서 장기적으로 볼 때는 문젯점이 없지도 않다.
「브라질」의 동양계 이민중 가장 큰 덩어리는 역시「자포네스」(일본인)이다. 현재 70만명에 가까운 일본인의 이민은 190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주로 채소농장으로 성공을 거두어 그들 고유의 생활양식을 지키면서 집단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이민은 그 규모나 역사에 있어 일본과 비교도 안되지만 성장속도는 무척 빨라 일본인들도 놀랄 정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