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믿음] 달팽이의 지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7호 27면

3월에는 침묵하던 버들가지들도 햇볕 따스한 바람에 휩쓸려 빗질을 시작한다. 출렁거릴 때마다 강변 이야기가 되새김질하듯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

이런 노래가 있다. ‘버들피리 소리 들려올 때면 그리운 사람이 온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인데, 사람마다 그리운 사람이 있을 게다. 그립던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어찌 보면 내 마음속의 설렘이다. 강변을 거닐며 돌멩이 하나 던지면 은빛 물결에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가사 구절은 봄꽃의 맑은 웃음 같다.

살면서 누구를 생각한다는 건 어찌 보면 행복하다. 며칠 전 봄비가 내렸을 때 유리창 너머로 빗방울을 보며 ‘버들피리’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마음도 버들피리의 순수한 노래 가사처럼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람 부는 쌀쌀한 오후,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전해줬다.

달팽이 한 마리가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부근에 있던 새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달팽이에게 한마디씩 했다. “이 멍청아!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올라가는 거냐?” 그러자 다른 새들도 거들었다. “도대체 그 나무에는 왜 올라가는 거니?” 옆에 있던 다른 새도 덩달아 말했다. “나무에 올라가 봤자 열매도 없어.”

마침내 달팽이가 대꾸했다. “내가 저 꼭대기에 올라갈 즈음에는 틀림없이 열매가 열려 있을 거야.”

어찌 보면 우리네 삶에도 달팽이의 그것과 닮은 부분이 적잖다. 보채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또 잘못될 걸 뻔히 알면서도 바라보고 믿어주는 부모의 마음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일은 결과가 보이고, 또 어떤 일은 여전히 진행형일 수도 있을 거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 중 첫째는 역지사지(易地思之)고 둘째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소통하려는 긍정의 마음이고, 새옹지마는 변화를 즐기는 여유일 것이다. 때로 우리 삶에 가슴 뭉클한 반전을 가져오는 ‘새옹’처럼 그 일이 오히려 내 삶에서 운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와 컴퓨터에 앉았다. 문득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사람을 만나기보단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차라리 쉬운 것 같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자. 껌을 버릴 때도 주머니에 껌 종이를 넣어뒀다가 꺼내 쓰면 된다. 지인들과 대화할 때도 “뭐라고? 그래서? 응! 그런데? 정말? 와!” 등의 단어를 자주 써보자. 여기에 “어머~어머~어머~”라며 자동자 브레이크 밟듯 세 번 연달아 말하면 서로간에 기막힌 소통이 이뤄진다.

어떤 일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잊자. 어차피 우린 깜빡깜빡하는 데 전문가들 아닌가. 지나간 일들은 묻어버리자. 그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미 한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은 초라해 보일 뿐이다. 지혜가 있든 없든 잊을 건 잊는 사람이어야 맺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봄 햇살 가득한 날, 선승처럼 가볍게 지리산 산동 산수유꽃을 보러 갔다. 침묵하던 산도 어느새 살림을 시작했다. 계곡 물소리에 꽃들은 노랗게 자신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순간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루하루 꽃피는 것도 두렵네/ 내 청춘도 꽃잎도/ 어느덧 나란히 갈 수 없기에’.

함양대원기(涵養大圓氣), 보보초삼계(步步超三界). 온유한 우주의 맑은 기운을 함축하고 걸음걸음 삼계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