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盤上)의 향기] 최소 6개월 피말리는 나날 … 배짱 두둑한 자가 웃는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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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무서운 집중이다. 1950년대 중반의 16기 본인방전에서 다까가와 가꾸(高川 格?왼쪽)는 판을 들여다보듯 자신에 집중하고 사까다 에이오(坂田 榮男)는 자신이 아닌 판에 집중한다. [사진 문용직 제공]

10번기는 이런 것이던가. 지난 2월 23일 이세돌 9단과 10번기 제2국을 막 치른 구리(古力) 9단의 얼굴은 지친 기색을 넘어 흙빛이었다. 그 얼굴엔 고통이 서려 있었다. 아니 절망, 절대(絶對)를 마주한 듯했다. 첫 판에 이어 두 번째 판마저 잃어 2대0으로 몰린 구리. 아, 저런 승부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 마음. 인간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메커니즘이 주어졌다는 것이 괴롭다.

치수 고치기 10번기는 역사 속으로
1956년 일본에서 우칭위안(吳淸源)과 다카가와 가쿠(高川格)의 10번기를 마지막으로 ‘치수 고치기 10번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우칭위안을 상대할 만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가 변해 타이틀 무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바둑을 개인과 가문의 목표로 삼고 있던 일본 바쿠후(幕府) 시대엔 두 개의 중요한 승부 무대가 있었다. 하나는 어성기(御城碁)로 권력자 장군 앞에서 한 판을 관례로 치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번기(番碁)였다. 번기는 10국, 20국 때로는 30국을 미리 정해놓고 두 사람의 승부를 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단 한판으로는 알 수 없다. 그건 우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라 실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몇 판이고 두어서 현격한 차이가 드러나야만 비로소 상대도, 세상도 인정할 터였다. 그것이 10번기, 20번기였다. 그런 번기는 때론 치열함이 부족했다. 그저 실력 차이나 보자, 또는 즐거움이나 연습으로 그런 형식을 택하기도 했다. 두다가 이쯤에서 그만 두자, 그런 적도 많았다.
이번 이세돌과 구리의 10번기는 어떤 형식인가. 먼저 전통적인 치수 고치기는 아니다. 단지 10판 두어서 6판 먼저 이기면 우승 상금을 독식하는 것이다. 실력 차이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런 방식의 승부를 오랜만에 맛보자, 그런 흥행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르다. 모두가 흥미로 바라본다 해도 두 대국자는 다르다. 이기면 500만 위안(약 8억7000만원)이고 지면 여비조로 20만 위안(약 3500만원)을 가져가는 엄청난 격차도 문제지만 매달 한 판만 두기에 그 오랜 시간을 긴장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의 위험을 동반한다.
두 사람은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1월 26일 제1국의 내용을 보니, 초반에 그것도 이른 초반에 두 사람 모두 승부사 기질이랄까, 배짱이랄까 그런 게 큰 승부의 중압감에 의해 약간은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기보1)이 그런 장면의 하나로, 이세돌(흑)의 흑1이 다소 무거워 때 이르게 곤마(困馬?어려운 상황에 처한 바둑 돌) 부담이 주어지는 국면이다. 관전자의 괜한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두 기사는 한때 세계 1인자를 누렸으니 실로 승부사 기질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뛰어날 터이다. 강한 기질과 두둑한 배짱을 갖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문제는 10번기의 성격.

좁은 반상 속 깊은 우물 같은 세계
이번 10번기는 어떤 승부일까. 치수 고치기가 아니기에 다소 다를 수도 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첫째, 바둑이란 것은 이렇게도 지는 것이다. (기보2)는 우칭위안과 그에 앞서 9단을 먼저 획득했던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齊)의 1952년 제1차 10번기 제9국이다. 형세는 후지사와(흑)가 유리했다. 그러나 흑1이 큰 실수. 백4 쉬운 장문(藏門?상대돌의 탈출을 막는 수)을 깜박했다. 이로써 치수가 선상선(先相先)으로 고쳐져서 실력이 1단 아래인 것을, 그 굴욕을 인정해야만 했다. 불빛이 어두웠기 때문일까. 때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승부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아니다. 그보다는 10번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탓이다. 한판 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빨리 잡아도 6개월은 걸린다. 그 6개월의 긴장을 이겨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바둑은 무서운 세상이다. 1835년 후세에 ‘토혈지국(吐血之局)’으로 알려진 한판 승부 에서 명인 조와(丈和)에게 패배한 아카보시 인테쓰(赤星因徹)가 대국 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결핵을 앓지 않았더라도 있을 법한 사건이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좁은 반상 속 깊은 우물 같은 세계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우칭위안의 거울론이다. 그는 말했다. “거울의 표면을 닦지 말고 거울의 안쪽을 밝게 하라.” 겉으로 드러나는 수법은 작은 경계. 반상 이전에 내면을 닦아내라.
그것을 심오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단지 인간은 스스로 불안을 치유하기에는 이해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그리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문명 이전에 인간은 주변에 포식자들을 두고 살았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인류는 주변을 불안으로 둘러보는 마음을 조성하였는데,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뭔가 일을 하지 않으면 부정적(否定的)인 공상으로 시간을 보내게끔 만들었다. 그러니 대국자는 대국이 끝나더라도 불안으로 시간을 보낸다. 10번기 전 기간 동안 불안한 의식 속에 산다.
그러나 응시할 힘이 있다면 인간은 그런 부정적인 내면을 걷어낼 수 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칭위안이 말한 바다. 그런 것을 담당하는 기술로는 명상이 가장 적합하다. 전문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그런 존재야. 너의 불안은 그런 데서 오는 거야.” 그것을 깊이 이해만 해도 명상의 효과를 얻는다. 그것을 후지사와는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칭위안이 20년에 걸쳐 당대 제1의 승부사들을 모조리 이겨 5대1, 6대2, 7대3 등으로 치수를 한 수 아래 강등시킨 것에는 바로 이런 힘의 차이가 있었다. 실력 차이도 물론 있었음은 틀림없지만.

한두 수에 일희일비해선 이길 수 없어
둘째는 승부의 본질과 승부사 기질에 관한 것이다. 소위 위험감수 심리냐 위험회피 심리냐, 그 차이에 관한 것이다. 바둑은 승부. 대국자는 승부사. 잠깐 방심하면 승부에서 멀어진다. 방심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상태다. 지향점이란 무엇인가. 승부에서는 긴장을 이겨내 불리한 반상은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유리한 반상은 안이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험회피 심리는 좋지 않다. 한 집 손해 보면 가슴을 치고, 두 집 손해 보면 하늘이 노래지는 것이 승부사의 기질. 그런 예민한 반상에 위험회피 심리는 어리석다. 질 때 지더라도 ‘깡’으로 버텨야 한다. 늦게 배웠으나 기질만은 한국 제1의 승부사였던 서봉수는 1993년 제2회 응씨배 결승을 앞두고 승부의 핵심을 잘라 말했다. “승부가 클수록 배짱의 승부다. 한두 수 잘 두고 못 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적중했고 그는 절망적인 5국을 이겨냈다. 당시 상대인 오다케(大竹) 9단은 유리했을 때 ‘새가슴’으로 반상을 ‘올려다’보았다.” 서봉수는 절망적이지만 배짱으로 반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번 10번기 와중에 구리 측에서는 3명의 조언자를 옆에 두었다. 이세돌의 약점을 파악해 구리를 돕고자 한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 최근의 이세돌 바둑을 분석해 대국 전 구리에게 조언하는 것은 위험회피 심리를 기른다. 그런 태도로 긴장을 이겨낼 수는 없다. 바둑에서는 개인의 고독한 내면, 그것이 절대적이다. 옆을 쳐다본다? 그런 태도는 바둑엔 없다.
셋째, 이번 10번기는 치수 고치기는 아니다. 과거 10번기는 5대1, 6대2 등 승패의 차이가 4판 나면 실력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번 시리즈에 그런 전제는 없다. 그런데 과거에는 10판 중에 4판의 차이가 난다고 해서, 예를 들어 5대1이 되었다 해도 그것이 곧 실력 차를 나타낸다고는 판단할 수 없음을 몰랐다. 통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4대0이 되었더라도 두 사람 간에 실력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이해다. 그러기에 우칭위안에게 패해 치수가 고쳐진 기사라도 실력의 차이가 있다는 자인(自認)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패배한 기사는 승복을 해야만 했다. 그 얼마나 굴욕적이었던가.
그러나 승부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곧 두 기사의 실력 차를 말해주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관전자는 폭넓게 10번기의 흐름을 전망해야 하며 즐길 수도 있어야 한다. 기사들의 입장에선 보다 냉정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현대 10번기의 승부를 처음 열어젖혔던 1939년 우칭위안과 기타니의 일본 가마쿠라(鎌倉) 10번기는 참으로 상징적인 승부였다. 달빛에 적셔진 두 대국자의 실루엣은 삭발한 머리의 배경이 되어 적정(寂靜)한 세계를 세상에 던져주었다. 산사의 적요(寂寥)함은 요동치는 반상과 대비되어 바둑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바둑은 홀로 잠기는 고독한 세계임을 세상에 각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아주 오래된 자화상.
흥행이 무엇이든, 승부가 어찌 끝나든, 대국 장소가 호텔이든 고궁이든 바둑의 그런 내면은 언제나 반상의 기초가 된다. 대국자는 물론이고 관전자의 이해와 태도에도 기초가 된다. 본질적인 속성으로 살아남는다.



문용직 정치학 박사,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수법의 발견』 등 다수.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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