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 좋은 책] ⑥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피론주의 개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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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게 생각이다. 생각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확신 아니면 회의다.

미국의 시인·사학자·철학자인 제니퍼 마이클 헥트가 지은 『의심의 역사(Doubt: A History)』(2003)에는 소크라테스, 예수, 토머스 제퍼슨, 스티븐 호킹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혁신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회의주의자라는 게 헥트의 주장이다.

 왜 회의하는 게 위대할까. 통상적으로 확신은 좋은 것, 의심을 품는 것은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다. ‘하면 된다’의 전제조건으로 흔히 제시되는 것은 확신이다.

 확신에도 부작용이 있고 회의에도 순기능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게 회의주의 철학이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쓰이는 회의(懷疑)와 철학적 의미의 회의는 좀 다르다. 철학에서 회의는 ‘충분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고 있는 상태’다. 회의주의·회의론은 ‘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상대적이라고 보아서 진리의 절대성을 의심하고 궁극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정의된다.

『피론주의 개요』의 영문판(Outlines of Pyrrhonism)과 국문판 표지.

 국어사전에 나오는 이러한 회의·회의주의의 철학적 정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기원후 160년께~210년께)의 『피론주의 개요』의 내용과 일치한다. 『피론주의 개요』는 고대 회의주의를 철학자 피론(기원전 367년께~275)의 주장을 중심으로 요약한 책이다. 모든 종류의 믿음에 대해 판단을 유보할 것을 주장하는 책이다. 어떤 문제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판단을 유보하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 명확하지 않으면 믿지도 말고 결론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모든 그리스 철학 학파는 마음의 평화라는 행복을 추구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따르면 마음의 평화는 어떤 목표라기보다는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판단의 정지와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그 어떤 믿음이나 주장·이론에 대해서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치판단을 너무 일찍 섣불리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결론을 일단 내리고 나면 그 결론이 맞는지 틀리는지 불안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결론을 내린 다음에는 남을 설득하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스스로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게 남을 설복시켜야 한다는 집착이 표면적인 열정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의주의자 중에서는 ‘확실한 것은 없다’며 불가지론에 가까운 과격한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확실한 게 없어도 개연성·확률에 따라 살면 된다고 주장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진리·지식·믿음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주장의 이유와 논리를 다각도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독단(獨斷)을 거부했다. 연구를 하지 않고 주관적인 편견이나 권위에 의지해 판단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독단을 ‘자만심과 경솔함이 원인이 된 병’이라고 봤다. 어떤 주장이 있으면 그 반대 주장도 따져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컨대 ‘아는 게 힘이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약이다’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에 대해서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주장을 편향되지 않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믿지 않고, 뭔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연·습관·관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보이는 그대로, 느낌·감정 그대로, 체험하는 바에 따라 살라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 된다. 또 자신이 속한 상황·사회 속의 관습·법에 몸을 내맡기면 된다. 그는 신(神)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경건함은 좋고 불경(不敬)은 나쁘다고 봤다. 사회적 관습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었다. 회의는 혁명과 친하다. 기존 체제에 대해 물음표를 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습을 중시한 점에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회의주의는 강한 보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중세 기간에 회의주의의 내용은 키케로의 저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졌다. 키케로는 “우리는 의심을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말도 남겼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는 불안과 독단이라는 인류의 끔찍한 양대 질병으로부터 구출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레고리오 교황은 피론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를 단죄했다. 그들이 회의주의라는 악성 질병을 사람들에게 퍼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피론주의 개요』는 15~16세기에 부활했다. 미셸 드 몽테뉴, 데이비드 흄 등에게 영향을 줬다. 근대철학 발전과 근대화의 전개에 자극을 준 것이다.

 탈근대는 전환기다. 전환기는 회의의 시대다. 하지만 회의주의가 지나치면 영원히 아무런 결론도, 결단도 내리지 못하게 된다. 맺고 끊음을 필요로 하는 행동도 있다. 『피론주의 개요』의 가치는 불안감을 예방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참과 거짓을 가르게 하는 ‘건강한 회의’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피론 … 의사·철학자·스승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알렉산드리아·로마·아테네 등에서 활동했다. 철학자 피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군을 따라 인도까지 갔다고 전한다. 신앙·의견·문화의 다양성을 목격한 게 회의주의 철학의 바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를 비롯해 인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회의주의를 신봉한 결과 매사에 무감각했으며 웬만한 일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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