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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의 외교 실패 되새길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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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신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5주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독일인들의 집단 기억에서 1차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에 대한 범죄의 그림자에 가려 있다. 그러나 독일의 대다수 주변국과 세계 각국에는 1차대전이 깊이 각인돼 있다. 최근의 수많은 연구보고서에는 1차대전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셈법이 자세히 나온다. 당시 유럽 각국은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섣부른 예측을 했고 적과 동맹군의 행동에 대해 오판했다.

 100년 전에 발발한 1차대전은 유럽 엘리트·군·외교의 총체적인 실패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역사다. 각국이 정치적으로 오판해 군대를 동원하는 비극적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기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 강대국들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당시 유럽 외교정책에서는 신뢰구축과 이해관계의 평화적 조정에 대한 의지나 수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을 토대로 비밀외교 수단에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제3자를 희생시켜 자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자료를 보면 정세 오판이 얼마나 빈번했고 정치적으로 근시안적 사고를 가졌는지가 잘 드러난다. 물론 그렇다고 독일 외교의 실패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당시 독일에서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에 사태를 첨예화하는 쪽의 의견이 관철됐다.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유럽의 심장부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독일이 시작한 2차대전으로 문명의 단절을 겪은 유럽은 동맹관계가 끊임없이 바뀌는 불안정한 균형 대신 ‘유럽 법 공동체’를 선택했다. 유럽연합(EU)을 통해 각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유럽인들에게는 강자의 권리 대신 강력한 법이 통한다. 물론 EU본부가 있는 브뤼셀의 협상 테이블에서 타협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힘들고 지루하며 느리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이 되는 올해, 과거 총부리를 겨눴던 수많은 나라가 이제는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평화적이고 신사적으로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게 이룬 성과인지를 되새겨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세력균형’이라는 깨지기 쉬운 체제가 오늘날까지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에 팽배한 국가주의적 분위기와 지역 패권을 노리는 야망은 이 지역을 훨씬 넘어서서 세계 평화와 안보 위험을 가중시킬 위협이 되고 있다. 1914년 1차대전 발발로 인해 최초의 세계화가 중단된 경험이 있다. 당시 유럽의 국민 경제와 문화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전쟁은 비합리적이고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터지고 말았다. 오늘날 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언제라도 다시 상처를 입고 마찰이 일어날 수 있으며 수많은 이해관계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대외정책에서 이성과 외교적 수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자국의 이익뿐만 아니라 주변국과 파트너 국가의 이해관계를 차분히 바라보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그 결과를 이성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현명한 외교를 펴려면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타협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과거와 비슷한 일이 오늘날 되풀이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을까. 이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는 책임 있게 행동하며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