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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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에서는 14세기까지만 해도 1년을 여름과 겨울 2계만으로 나누었다. 가을(오텀)이란 말은 15세기 무렵 작가 「초서」에 의해 비로소 사용되었으며 봄(스프링)이 나타난 것도 16세기가 되어서였다.
영국 고유의 가을은 「하비스트」(수확) 혹은「폴」이라고 한다. 「폴」은 떨어진다는 말에서 유래한 낙엽을 뜻한다. 「폴」이라면 어딘지 「폴·M·베를렌」의 시처럼 심통하고 적막한 생각이 든다. 하긴 두보의 시를 읊어보아도 가을은 비탄과 향수에 잠기게 한다.
한자에 있어서 「가을 추」자의 쓸모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다. 가을은 유독 동양인의 기질에 맞는 계절인 것 같다. 「유럽」의 가을은 그 감각으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기후는 보잘것없다. 영국과 같은 나라는 가을의 명물로 안개를 꼽는다. 축축한 날씨에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어 도무지 정신이 몽롱해진다. 대체로 「유럽」의 가을기후들이란 이처럼 햇볕이 아쉽고 침울한 편이다.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보면 주인공 「안드레이」가 전장에서 맑게 갠 가을하늘을 보고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 이 얼마나 조용하고 장엄하냐! 나는 왜 이제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다. 지금 깨달은 것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렇지. 이 하늘 말고는 모두가 거짓이다.』그때 「나폴레옹」은 전장을 시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이」청년의 눈엔 그런 것도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가을은 실로 아름답다. 어쩌다 후둑후둑 가을비가 내릴 때도 있지만 맑은 날씨가 많은 편이다. 하늘은 높고 푸르기가 말할 수 없다. 기온마저 쾌적한 20도(C)를 오르내려 정신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 중에서도 10월은 가을의 극치를 보여주는 달이다.
바로 이 달을 「문화의 달」로 삼은 것은 그야말로 한국적인 발상인 것 같다. 문화가 10월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기후만은 문화적인 「무드」를 갖고 있다. 지방에선 갖가지 향토 문화재를 갖고 또 학술행사들도 10월엔 두드러지게 많다. 사람들은 공연히 이 무렵이 되면 화랑도 산책하고, 음악회에도 즐겨 간다. 서점에도 또한 활기가 찾아든다. 가을과 함께 위의 공허를 느끼게 하는 식욕뿐 아니라, 마음의 공허를 실감하게 하는 정신의 욕구를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문화」는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창조하는 정신에서 비롯된다. 문화가 다만 관가의 행사로서 그칠 일은 아니다. 창조적 정신의 계발, 그것이야말로 「가을문화」의 수확이다. 「생각하는 가을」, 「각성하는 가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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