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시체 불태울 때 일공사 비서도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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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구한말의 반일적인 왕비 민비 시해사건의 생생한 정경과 관여자의 상세한 명단 및 그것이 일본정부의 직접지휘로 자행돼 당시의 명치천황까지 긍정적으로 발언했음을 밝혀주는 수기가 새로 발견됐다.
80여 년 만에 드러난 이 극비의 기록은 재일 한국연구원장 최서면씨가 24일 독립운동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것. 최원장이 최근 일본 고서점에서 입수해온 당시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삼포오누)의 개인비서 「후루사와」(고택행길) 의 『한성몽물어-민비사건비사』(1941년「하르빈」에서 출판)와 전중물오랑의 『왕비사건』 등 두 책이 그것이다. 『한성몽물어』에는 특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살해에서 화장까지의 광경이 소상히 기록돼있어 침략을 꾀하던 일제의 만행을 한층 되살려 주고 있다.
즉 『민비시해 직후 시체는 「오기하라」(적원) 경부(영사부경부) 「교오다」(협전) 공사(공사호위순사부장) 「스즈끼」(침목)(통역) 그리고 나와「히라자와」(평택)가 함께 민비 시체가 있는 방에 들어가 옆에 있던 잡부2명을 시켜 시체를 판대기에 실어 동쪽 작은 문(영추문이란 소액으로 기억하나 동쪽문의 명칭으로는 수긍이 안 간다. 지금 영추문 전차정류장은 궁의 서쪽에 있다)으로 들고 나가 솔밭 숲 속에서 화장했다) 저자인 「후루자와」는 당시 다비의 광경을 『을미년(1895년)10월8일 상오9시 늦가을의 맑은 대기속에서 민비 시체가 타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고 기술하고 있다.
또 이 책에는 민비의 시신이 엷은 노란 색 상의와 흰 비단 하의를 입고 후두부에 3「인치」의 칼자국과 다리에 혈흔이 있었다고 쓰여있다. 기술된 시해사건 당시의 「미우라」공사사무실 정경을 기술한 대목을 보면 『「미우라」는 「후루자와」에게 오늘밤 궁에서 나를 부를 것 같으니 가마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내전 총영사집에 가 저녁을 먹고 밤9시에 돌아왔다.
새벽 3시 「스기무라」(삼촌) 서기관을 불러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는데 새벽5시 푸른 옷과 검은 모자를 쓴 궁인이 달려와 황제께서 들어 오란다는 전갈을 전했다』고.
「후루자와」가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는 대목에서 『이 문제는 국제관계의 깊은 기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표를 꺼려 왔으나 「미우라」공사의 친척이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충고에 용기를 얻어 썼다』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민비 시해는 당시의 일본정부가 계획적으로 자행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정부의 공식개입은 이밖에도 천황의 시종 「요네다」(미전)가 민비 사건 후 「미우라」공사를 방문, 『천황이 민비 사건 소식을 물었을 때 일을 해치울 때는 해치울 줄 아는 자이군』이라고 전했다는 전중물오랑이 쓴 『왕비사건』이란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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