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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1894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중국 전승절 열병식은 장관이었다. 삼군 의장대가 121보를 걸어 오성홍기를 게양했다. 한 걸음마다 격동의 역사에 스민 피가 솟구쳤다. 그것은 ‘1894’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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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탕사오이(唐紹儀)와 갑신정변
얼마 전 중국의 지인이 탕사오이의 서울 행적을 알고 싶다고 하여 조계사 근처의 옛 우정총국 건물로 안내한 적이 있다. 탕사오이(1860-1938)는 청말 민국초의 외교가이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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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하토야마, 민비의 비명이 들리는가
경복궁에도 가을의 착색(着色)이 시작되고 있다. 북쪽 끝 건청궁(乾淸宮)에 들어섰다. 고종과 민비가 살던 곳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민비는 옥호루에서 패륜무도(悖倫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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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진실
그날 밤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침전인 건청궁 곤령전에서 떨고 있었다. 흉도 들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왕을 붙잡고 왕후(민비)의 폐출을 요구하는 문서를 내밀고 서명하도록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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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제국의 최후-민비시해(7)
을미사변이라고 불리는 명성황후(민비) 시해사건은 한국병합을 위한 일본의 책략가운데 가장 무모했던 도전의 하나다. 사건의 충격과 영향은 컸다. 그날의 진상도 널리 알려졌다. 새삼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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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의 흙을 만지며
민족수난의 현장을 국민교육도장으로 만든다는 정부계획에 따라 1차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교회터의 순국지사 매장터가 발굴되고 있다. 이미 일본군이 화염병으로 사용했던 맥주병이 출토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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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자 체불기『어느 정치적 살인자』 요지(하)
『홍종우의 정신속에는「독립」이란 것과 천진난만한「굴종」이 이상하게도 혼합되어있었다』고「레가메」는 설명했다. 이것은 그후 홍의 김옥균 암살행위를 설명하는 한 단서가 됨직도하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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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대 토론…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김옥균과 갑신정변
『모반대역부도비인 옥균 양화진두 당일 부대시 능지처참』 1894년3월9일 서울교외 양화진두에서 김옥균의 시체는 능지처참되어 팔도에 나눠 보내졌다. 장대에 잘라 매단 그의 목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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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시체 불태울 때 일공사 비서도 있었다
구한말의 반일적인 왕비 민비 시해사건의 생생한 정경과 관여자의 상세한 명단 및 그것이 일본정부의 직접지휘로 자행돼 당시의 명치천황까지 긍정적으로 발언했음을 밝혀주는 수기가 새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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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시해가담 일순사 수기발견
80년전 민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인 순사의 수기가 발견돼 당시 일제의 침략만행과 시해계획 등이 소상히 밝혀졌다. 재일 한국연구원장 최서면씨가 입수, 귀국하면서 공개한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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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해방에서 환국까지
해방전 일본의 교육방침은 되도록 조선인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기르치지를 않았으므로 학교에서는 절대로 진정한 역사를 배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구왕실의 역사도 잘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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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고균 김옥균(하) - 유홍렬
한편 민비는 세자와 궁녀들을 책동하여 빨리 환궁할 것을 재촉하므로 일단 어가를 경우궁보다 넓은 계동궁 이재원 가로 옮겼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선인문 앞에 있던 청군(오조유진)이 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