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의 흙을 만지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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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족수난의 현장을 국민교육도장으로 만든다는 정부계획에 따라 1차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교회터의 순국지사 매장터가 발굴되고 있다.
이미 일본군이 화염병으로 사용했던 맥주병이 출토됐고 교회를 불질렀던 갖가지 만행의 증거와 함께 유해 2구가 출토됐다. 민족의 통곡으로 얼룩졌던 63년전의 그 참상이 다시금 기억에 새롭게 떠오르는 순간이다.
제암리 교회의 양민학살사건은 일제의 3·1운동 탄압사에서도 가장 악랄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1919년4월15일 오후2시께 일제 군경대는 잠깐 연설만 들으면 된다면서 마을주민들을 초가집 교회에 모았다. 이내 문에 못질을 하고 일제사격을 개시,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29명을 학살한 뒤 교회에 불을 질렀다.
장정은 물론 유아까지 살해하고 마을 민가마다 불을 질렀다.
시체나마 수습하려던 마을주민들의 접근을 금한 것은 물론 부녀자까지 학살한다는 소문에 주민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피했어야 했다. 이틀뒤「스코필드」박사의 노력으로 유해는 부근 공동묘지에 매장된채 6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양심있는 일본의 기독교인을 몇몇이 찾아와 만행의 터에 머리숙여 사죄하고 성금을 거둬 교회를 지었다.
지금 우리가 학살의 현장을 발굴하는 것은 단순히 그날의 증오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으나 그 만행의 원한만을 되씹고 앉아있을 우리는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 뼈아픈 과거를 결코 잊지는 않는다. 또 잊지 말아야한다. 그들을 용서함은 관인대도의 마음이나 그런 기억조차 잊어버리면 민족의 도리가 아니다.
일본은 저금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시금 군사대국의 길을 치닫고 있는 것이 63년이 지난 현실이다. 이미 역사교과서까지 왜곡시켜 당시의 침략을 정당하거나 적어도 불가피했다는 쪽으로 국민을 교육시키려한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우리의 경제심은 다시 눈을 뜰 때다. 비록 일본은 우리의 선린이요, 정치적 경제적 파트너이지만 그들의 장래 역할은 충분히 경계해 마땅하다.
아울러 우리는 제암리의 피맺힌 흙을 만지며 다시금 국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반성하는 국민적 각성도 절실하다. 결국 나라까지 병탄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은 우리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지금도 힘의 논리는 국제사회에서 횡행한다.
후세에 대한 민족적 각성은 교육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뒤늦게나마 우리가 민족수난의 현장을 단장시켜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삼으려는 뜻은 바로 우리자신의 각성을 위한 것이지 그 어느 외국을 증오하려는 뜻은 아니다.
정부의 계획으론 85년까지 9개 민족수난의 유적지가 단장되리라 한다. 청왕에게 항복한 삼전도 나루터, 민비시해 현장, 제주도의 항몽 근거지가 모두 포함된다. 실로 부끄러운 역사지만 사실대로의 역사를 가르침이 바로 민족적 각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교육의 도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정확한 고층아래 단장되어야할 것이다. 시간에 쫓겨 부정확한 장소에 어설픈 단장은 오히려 교육적 효과가 반감될 우려도 있다.
민족수난의 현장을 둘러보는 후세들은 책에서만 배웠던 사실이 공간적으로 확인되는 것에 학구적인 희열을 느낄 것이다.
아울러 선열들의 수난을 통해 이룩한 오늘의 민주국가에 대해 보다 큰 애정을 느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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