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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대 토론…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김옥균과 갑신정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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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모반대역부도비인 옥균 양화진두 당일 부대시 능지처참』
1894년3월9일 서울교외 양화진두에서 김옥균의 시체는 능지처참되어 팔도에 나눠 보내졌다. 장대에 잘라 매단 그의 목에는 그의 죄명을 기록한 내무부의 패가 걸려있었다. 44세의 장년으로 중국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의 총탄에 쓰러진지 2주, 다 썩어 가는 시체였다. 성리학적 전통사회에서 행해지던 최고악형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통해서 지양하려던 정치체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개화당의 삼일천하>
이 때를 전후해 김옥균과 그의 개화당이 주도하려던 한국의 역사에는 동학민란이 발발하고 그 틈을 이용한 청일의 대결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의 국제정치까지도 변혁시키는 청일전쟁으로 번졌다. 또한 김옥균과 그의 개화당들이 생각하던 개화론은 한국침략의 주동자인 일제에 의하여 타율적 성격이 농후한 갑오경장이 추진되어 보다 왜곡되어 갔다.
이보다 10년 전인 1884년12월4일 34세의 젊은 김옥균은 개화당을 이끌어 갑신정변을 일으켜 이 땅의 역사의 방향을 바꾸려하였다. 갑신정변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우정국 개국 연을 이용하여 사대당의 중요 인물들을 장사 배로 하여금 숙정하고 정권을 장악, 급진적인 개화혁신을 단행하려던 기도였다. 약간의 차질은 있다해도 사전계획대로 추진되어 사대당의 병권을 장악했던 윤태준·이조연·한규직과 민영목·조영하·민태호 등의 대신을 도륙하여 사대당의 요인을 제거했다. 그러나 사대당의 수령 민영익을 자상한데 그쳐 생명을 부지시킨 일은 그들의 앞날의 암운을 예고하는 불길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일본공사와 모의한대로 일본군을 끌어들여 고종과 민비를 호위하기 편한 경우궁으로 모시고 이재원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하는 개화기 내각을 성립시켰다.
이 정부의 특색은 개화당인물이 아닌 사람도 포함되었으나 ①군사력을 장악하는 사영사와 경찰을 지휘하는 포장은 박영효와 서광범 그리고 서재필이 실권을 쥐어 개화당의 요인으로 독점하고 ②김옥균 자신은 호조참판으로 재정권을 장악하여 개혁정치의 경제적 측면을 전담하였고 ③왕명의 출납을 맡는 도승지에 박영효의 형인 박영효를 임명, 반대파의 간여를 폐쇄하였으며 ④좌의정에 홍영식을 임명하여 행정체계의 상하기관을 모두 개화당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리고 민비의 척족 세력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그와 반대세력이던 대원군 계와 대왕대비조씨계 인물들을 그다지 실권 없는 자리에 배치, 사대당을 몰락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갑오경장 천년 앞서>
하룻밤 사이에 이같이 성립된 개화당정부는 그 다음날 아침 미국공사「푸드」와 영국총영사「애스턴」등을 접견해가며 그들이 염원하던 정치이념을 실현할 정강을 마련하고 그에 입각한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기 시작했다. 마치 전광석화 같은 변혁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더우기 이념이 높아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파괴하고 근대사회를 건설하려는 한국근대사의 새 장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역사의 좌표를 옳게 가리킨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하겠다.
갑신정변은 개화당정부가 급진적으로 성안한 정강 속에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갑오경장을 10년 앞서는 개화혁신의 이념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임오군란 때 청국으로 납치되어간 대원군을 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허례를 폐지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과의 오랜 종주관계를 끊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표방한 김옥균 등 개화당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자주독립의 이상은 한국을 근대국민국가로 전환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문벌을 폐지, 국민평등권리를 제정하고 인물본위로 관리를 등용한다는 것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의 중요 인물들은 다같이 누구나 알아주는 양반이면서도 양반을 타파하여야만 나라가 잘된다고 믿고 있었다. 나아가서 국민평등을 실천하여 전통사회의 기본질서인 신분제를 부정하였다. 즉 그들은 근대시민사회를 지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불합리한 국가재정의 운용을 혁신, 지조법 개정파 국가재정의 일원화를 통하여 재정의 확립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만은 정변 중에 개화당에 끌리어 의구심마저 가졌던 고종까지도 난색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기본적 경제질서 원리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려했던 측면이다. 여기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김옥균이 내각의 화려하고 높은 관직을 다 제쳐놓고 호조참판에 취임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근대정치의식의 수준을 넉넉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전국의 사환미를 영구히 탕감하는 정강을 포함시켰다. 이것은 세도정치이래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농촌경제가 파탄으로 달리는 측면을 적절히 판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정변실패 후 여전히 농촌경제의 구제책이 근본적으로 마련되지 못해 동학민란으로까지 번진 역사적 사례를 주목한다면 이 정강이 때에 맞는 개혁책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는 사영을 합하여 일영으로 통합하고 영중의 장정을 골라 시위대를 설치하며 세자를 육군대장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제의 큰 개혁으로 군사력의 핵심인 조직의 일원화, 명령의 일원화를 기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근대 군대의 발전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유홍기의 선각 사상>
여섯째는 조속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둑을 잡는다는 항목도 포함되었다. 이점은 근대 경찰제의 정립을 목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연이은 개화당의 정강은 결국 그들의 개화사상의 근저가 청의 예속에서 벗어나 「부국강병」을 통해 근대국민국가건설에 역점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갑신정변 속에 보이는 개화당의 이념과 사상은 그 원류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개항직전 개학사상의 선각자인 유홍기 오경석 박규수 이동인 등의 영향이 많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영향을 준 것은 1880년 전후 개화당주역들의 연이은 일본시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옥균은 1881년부터 3차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박영효도 임오군란 직후, 수신사로 사항 하였다. 또한 서재필도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후 한국에도 무관학교를 설립하자고 건의한 인물이다. 그밖에도 수신사항을 따라 혹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명치유신으로 개혁된 일본을 목도한 사람이 많았다. 재기발랄하고 뛰어난 정치감각을 가진 이들은 개혁된 일본의 비약적인 발전을 한국이라고 이룰 수 없겠느냐고 자신하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20대 내지 30대의 젊은 나이로 그렇게도 대담한 정변을 일으켜 험난한 한국의 앞길을 헤쳐가려 하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주역은 명문 출신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중심 인물들의 이념과 자신은 이같이 충천하였다 할지라도 그 한계는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지향하였던 정치이념이 근대국민국가건설에 있었다면 그 이념을 추구하는 역사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인식했어야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는 정치색맹에 가까왔다고도 볼 수 있다. 전통 사회가 근대사회로 지향하기 위하여는 개화의 기반이 되는 외압의 배제가 필수요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눈에 보이는 청의 압력은 인식하였지만 보이지 않고 도사리는 더 무서운 제국주의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김옥균 등의 개화당이 가진 이 같은 문제가 그들의 이념과는 달리 갑신정변을 전근대적 방식으로 추진하고 맡았다. 집권당을 왕조정치의 정변이나 반정 등에서 할 수 있듯이 장사 배로 몰살하고 정권을 탈취한 후 왕명을 앞세워 그들의 사상을 실천하려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의 장사패 만으로는 손도 못 대겠으므로 하필이면 외압의 앞잡이로 등장하는 일본군대를 의지하여 결단하고 만고역적의 맥명을 뒤집어썼다. 개화당의 목표가 일본을 모범으로 그같이 개조하려 했다면 그들이 직접 목격한 일본의 국시가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였음을 왜 간파하지 못했을까. 이점만은 그들이 사대당이라고 부르던 집권당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김옥균을 중심 인물로 한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소수의 근대적 정치이념가들이 대담한 비상수단으로 권력을 잡은 다음 그들의 이념을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대중에게 이해시킴으로써 지배를 하려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치행위의 성격을 보면 「쿠데타」의 한 유형으로서는 일반적인 것이나 역사적 과제의 해결책으로서는 무모한 일이었다. 그것은 개항이후에 놓여진 한국의 현실이 개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첫째 혼탁된 전통사회 속에 자란 정쟁의 지양이요, 둘째 밀어닥치는 제국주의 외압에 대한 적절한 회피만이 개화당들이 생각했던 한국의 근대국민국가로의 길이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도리어 딴 길로 가고 말았다.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주역들의 정치적 사회적 성분은 특히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김옥균은 당시 양반 중에도 상위를 차지하는 세도정치의 명문이고 정권주변의 장금 출신이었다. 더구나 본인의 뛰어난 자질 탓으로 20세에 장원급제하여 쉽게 30전에 정삼품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고 국왕측근에 출입하여 정치핵심에 간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치적 식견이 높아 개화냐 척사냐의 갈림길에서 남보다 앞질러 개화의 선도적 정치가로 등장하여 개화당을 조직, 그를 이끌게 되었다. 여기에 혁명이든 정변이든 대답하게 추진할 수 있는 열혈적 기질과 용기를 지녔다.
정변 때 개화당인물 중 최고직을 차지한 홍영식은 바로 영의정을 역임한 홍순목의 아들이며 박영효는 철종의 유일한 부마신분으로 다같이 정계에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위였다.
그밖에도 서광범은 5대 각신을 배출한 서상익의 아들이며 서재필 또한 그의 일족이다. 이 같은 갑신정변주역들의 출신과 생애는 그들의 갑신정변의 의미와 함께 반드시 한국근대사에서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면이 크다.
그것은 갑신정변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큰 방향을 돌린 역사적 사실로 이해할 때는 외세의존의 왜곡된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의미를 부정하기에는 갑신정변이 한국근대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 갑오경장보다도 10년은 앞당긴 자율적 근대화의 추진이었다는 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따라서 이런 점에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근대화의 한 연원으로 갑신정변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까닭이 있다.

<자력 없는 개화의욕>
아무래도 개화당과 그들의 갑신정변이 제기할 문제점은 개화와 외압에서 시작된 한국근대사의 문제인 근대국민국가완성의 시점을 다시 기다려야 될 것 같다. 민족사가 박은식의 『한국통사』중 다음과 같은 갑신정변평론의 결구는 이를 시사하는 것 같다.
『정변에 참여할 사람들은 인도하는 사람도 없고 찬동하는 사람도 없이 거사하여 갑자기 시행하려하니 난폭하기 마련이다. 위로는 군부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옆으로는 관료의 지지도 없고 아래로는 군민에게서도 환심을 얻지 못하여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니 그 어찌 구제되겠는가.
또한 혁명가는 천하에 지극히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하에 지극히 험한 길을 밟아야하며 오로지 자기의 힘을 발휘함으로써 외국인에게까지 이익이 미쳐야한다. 도리어 외국인이 우리 내홍에 간섭하며 하물며 우리 나라가 자신이 관리하지 못하고 외국인의 힘을 빌어서 그들에게 자루(병)를 빌려주니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손을 거두고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바로 비둘기가 까치둥우리를 엄연히 차지하여 살며 그 보수를 책하듯 백천갑절 내라하면 장차 무슨 법으로 제지할 것인가. 또한 독립도 자기 힘으로 얻어야 공고하며 다른 나라의 힘에 의지하여 얻을 것 같으면 소위 독립이 된다하더라도 허명 뿐이고 그 명 또한 오래 부지하지 못하니 어찌 고귀하다고 하리오. 이것은 천하의 형편을 알고 열력과 열성과 연구의 깊이가 있지 아니하고 한갓 거칠고 대담한 예기로 급격히 거사하려는 것은 반드시 실패하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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