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도 천차만별 '와인 경매'의 세계 … 안을 들여다보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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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 샤또 마고.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는 프랑스의 국보급 와인.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와인 애호가로도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마고를 진심으로 아껴서 딸의 이름을 마고 헤밍웨이로 지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다음은 2005년산 샤토 마고 6병입니다. 900만원에 출발해서 50만원씩 올라갑니다.”

경매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객석에서 번호표가 올라간다. “900, 서면 950입니다, 1000만원 계십니까?” 전화와 서면으로 응찰을 대신 진행하는 경매사 직원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서면 1000.” “서면 1000만원 받았습니다.” 다시 객석 번호표들의 움직임이 속도를 낸다. “1050입니다.

1100만원?” 이때 전화기를 든 직원이 재빨리 번호표를 든다. “1100만원” “1100. 최고 응찰가 110만원입니다. 1150만원 여쭤봅니다. 1150?” 실내가 숨죽인 듯 조용하다. “1100. 최고 응찰가 1100만원. 전화응찰 123번 손님께 1100만원에 낙찰됐습니다.” 경매사가 작은 방망이를 탁자 위로 내리쳤다. 탕!

지난 12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K 옥션 경매장에선 ‘2014년 K옥션 봄 경매’가 열렸다. 오늘의 경매작품은 근현대화, 해외 미술, 고미술품을 비롯해 183점. 3시간가량 진행된 이날 최고가를 받은 작품은 미국의 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조각품 ‘아모르(Amor)’였다. 낙찰가는 1억9000만원.

하지만 이날 경매에서 제일 눈에 띈 것은 응찰번호 125번부터 128번까지 등장한 프랑스 와인 이다. 이날 경매장엔 와인 매니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명품들이 등장했다. 보르도 지방을 대표하는 5대 샤또 ‘샤토 라뚜르’, ‘샤또 마고’, ‘샤또 라피트 로칠드’, ‘샤또 무통 로칠드’, ‘샤또 오브리옹’ 2004년과 2005년 빈티지가 총 출동했다. 그중 최고가를 받은 것은 2005년산 샤또 마고. 6병에 1100만원을 낙찰 받았다. 여기에 낙찰수수료와 위탁수수료를 합하면 낙찰자는 1245만2000원을 내야 한다. 한 병 당 가격은 약 200만원.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외국의 유명 경매에 와인이 등장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국내 메인 경매에 와인이 등장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1998년 처음 시작된 K옥션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K옥션 홍보팀의 손이천씨는 “자선경매나 소규모의 비정규 경매에서 한두 병 출품된 적은 있지만 메인 경매에 20병 이상 출품된 것은 처음”이라며 “경매 품목의 다양화를 위한 첫 시도였다”고 말했다.

2 2005 샤또 무통 로칠드. 1945년부터 샤갈, 피카소, 달리, 미로, 칸딘스키, 앤디 워홀 등 세계적인 작가들에게 의뢰해 그린 레이블로 유명하다. 2004년 레이블은 영프 우호조약 100주년 기념으로 영국 찰스 왕세자의 그림이 사용되는 등 희귀 레이블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수집 1순위 대상으로 꼽힌다.

국내에서 와인이 트렌드가 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그런데 와인 경매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와인 칼럼니스트 김혁씨는 “아직까지 국내 컬렉터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와인 컬렉션의 의미는 ‘희귀 빈티지’ 또는 ‘올드 빈티지’를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높은 주류세 등으로 와인 유통이 쉽지 않은 데다 시장이 크지 않아서 희귀 빈티지나 올드 빈티지가 수입되기 쉽지 않다. 한 해에 겨우 수천 병이 생산되는 명품 와인들은 전 세계에서 눈독을 들이는지라 거래 역사가 짧은 한국까지 할당되기 어렵다.

와인은 아주 까다로운 제품이다. 온도에 민감하고 작은 흔들림도 품질에 영향을 끼친다. 전문 셀러를 구비하지 않으면 보관도 어렵다. 그런데 이 전문 셀러라는 게 웬만큼 재력을 갖추지 않으면 엄두가 안 난다.

와인 경매를 위한 검증절차와 매뉴얼이 부족한 것도 와인 경매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명품 와인의 경우 생산자부터 판매상, 수입상 등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기록이 주민등록처럼 따라다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마네 콩띠는 병마다 고유 번호가 붙여져 있다.

경매에 나온 와인은 더 까다롭다. 김혁 와인 칼럼니스트는 “와인은 같은 해에 생산된 것이라도 병마다 아주 미세하게 달라서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곳에선 경매 전후에 철저한 검증 절차를 밟는다”고 했다. 와인 전문가가 병을 열고 테이스팅을 해서 품질을 인정한 후 똑같은 와인을 시음한 만큼 다시 병에 담는 일도 있다. 물론 이때 품질의 이상이 생기면 적절한 변상 또는 반환 절차가 이뤄진다.

국내에서 와인 경매가 흔치 않은 건 이런 검증 절차와 AS 제도가 아직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은 것도 이유다. 그렇다면 이번 K옥션 경매에 출품된 와인들은 어떨까.

이번 와인 출품자인 레스토랑 ‘두가헌’의 박현진 대표는 “1주일 내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전문가 감정 후 경매를 취소할 수 있다”며 “하지만 부쇼네(와인 코르크가 상해서 와인 맛에 영향을 주는 경우) 같은 경우는 생산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출품자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소비자 입장에선 수백 만원짜리 와인이 잘못됐는데 판매한 사람이 책임지지 않겠다니 참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 와인 한 병을 들고 프랑스까지 날아갈 수도 없고. 하지만 경매의 여러 가지 목적과 과정을 알고 나면 이해가 가는 대답이다.

경매에 출품되는 와인은 시중 소비자가의 50~60% 가격으로 출품된다. 경매 추정가의 범위가 바로 시중 소비자가다. 오늘 경매에서 최고가로 낙찰된 2005년 샤또 마고의 경우 6병의 가격은 시중에서 1700만원부터 2000만원까지 유통된다. 경매에 나온 와인은 이보다 훨씬 낮은 900만원부터 가격이 시작되고 오늘처럼 1100만원에 낙찰될 수 있다. 이런 경매가의 묘미 때문에 낙찰자는 어느 정도 위험요소를 감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말하자면 좋은 제품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복불복은 인정하고 경매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출품자 역시 높은 가격에 낙찰되길 바라지만 이번처럼 중간 가격대에 낙찰되면 아쉽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경매의 생리다.

박현진 대표는 “그래서 와인 출품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2004년 문을 연 두가헌은 와인 전문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다. 최상의 셀러와 전문가들이 준비된 곳이다. K옥션 경매에 출품된 와인들은 생산자로부터 바로 받아 2008년에 두가헌 셀러에 입고된 제품들이다.

박 대표는 “한국은 아직 와인 경매 역사가 없어서 제대로 된 포맷과 시스템이 부족하다”며 “그런데도 이번 와인 경매에 출품한 이유는 와인의 안정된 가격과 양성적인 유통을 위해서”라고 했다.

“와인은 수입 시점, 마진율에 따라 가격이 들쭉날쭉합니다. 지금도 전문가의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온라인이나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 고가의 와인이 유통되고 있죠. 미술품도 경매 문화가 정착되기 전엔 그랬습니다. 낙찰가라는 건 결국 소비자가 원하는 구매가니까요.”

1병에 수백 만원짜리 와인. 평범한 이들에겐 참 가까이 하기 어려운 와인이다. 하지만 와인 경매 문화가 정착한다면 와인 매니어로서 명품 와인의 종류와 빈티지에 따른 가격의 차이 등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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