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회 정기국회의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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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94회 정기국회가 22일 문을 연다. 정기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다음해 예산과 이에 관련된 안건의 심의다. 정기국회가 흔히 예산국회로 불리는 이유다.
이번 국회에서 다루어질 내년도 예산안은 올해에 비해 58%가 팽창한 2조4백19억원의「매머드」예산이다. 국민의 내국세 부담도 68.9%나 늘어나게 되어 있다. 그럴만한 이유를 감안하더라도 중압감을 금하기 어려운 심정이다. 따라서 이번 국회에서 예산심의에 임하는 국회의원들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특히 봉급생활자 영세민 등 서민층의 부담을 줄이는데 노력이 요청된다. 예산을 편성하다보면 행정부는 예산의 수요 측면을 우선 고려하게 되는 성향이 있다. 이를 견제하여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회 본연의 임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자 우리 국회의 예산심의 기능은 재대로 수행되지 못한 감이 없지 않다 .정치적 문제로 격동했던 작년 정기국회는 진정한 의미의 예산심의가 없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여당 의원들만이 단독으로 예산을 심의한다 하면서 예산규모를 깎기는 커녕 3백억원이나 증액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어선 안되겠다. 이러한 변칙이 반복되면 국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물론, 국회자체의 존재의의마저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번 정기국회를 기해 여당은 유신국회상의 확립을, 야당은 민주국회 기능의 회복을 각기 다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여야의 기본입장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기본입장을 표방하는 여야당이 국회에 임하는 구체적 자세를 보면 상당한 거리가 느껴진다.
여당 측은 야당과의 대화에는 응하되 다수결로 모든 안건을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최종적으로 국회의 모든 의사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것을 구태여 강조하는데는 대화에 대한 기대를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정기국회의 기본운영일정 결정과정에서 이런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다.
여야의 국회운영일정 협의과정에선 야당총재의 대표질문 예우, 정부로부터 환부된「증언·감정법」의 재입법 및 신민당 제안의 세법개정안 처리 시기 등에 합의를 보지 못해 운영위에서 표결로 일정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정도의 입장차이가 여야간에 합의를 저해할 정도의 문제인지 의문이다.
지난번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입법한 증언·일정법은 정부가 환부한 문제점을 고쳐 재입법키로 한 이상 재입법 시기를 늦출 이유는 없다고 본다. 대정부질문에 있어 야당 당수에 대한 특별예우를 못하겠다는 여당이나, 이를 구태여 고집하는 야당이나 모두 각박하고 도량이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법 개정 결과가 내년 예산에 반영만 된다면 세법을 예산에 앞서 심의하든지 병행 심의하든지간에 별 문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여야간 진정한 대화 자세의 결여에 있다.
대화는 의회정치의 바탕이다. 여야간에 대화가 활발할 때라야 국회 나름의 행동 논리도 확립될 수 있다.
여의도의 새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것 국회가 새로운 국회의 행동논리를 확립하는 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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