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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제47화>전국학련-나의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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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탁학련 결성>
반탁학련준비대회를 끝낸 우리는 각학교 대표들의 빈번한 모임을 통해 반탁학생대회를 준비했다.
고하 송진우선생의 장례식 준비기간이 우리의 대회준비기간이 됐다. 한편으로는 경교장회의에도 자주 나가 그 결의와 지시를 따르는데 전력투구했다.
46년1월7일은 학생단독의 힘으로 학생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날.
이날 서울운동장에는 경성대학 보전 연전 세의전 이전등 시내 16개남녀 전문대학을 비롯하여 보성 경기 경동 양정 휘문 중앙등 15개 남녀 중등학교를 포함해 도합 31개교생 약 1만여명이 집결했다.
나는 대회에서 『우리는 오직 조선사람이라는 자각으로 신탁을 반대하고 즉시 자주독립을 요구한다』는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대회는 이어 세의전의 김덕순군이 낭독한 『연합국 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우뢰같은 박수로 채택했다.
이어서 결의문이 채택됐다. 그 내용은 ①민족자결·신탁통치 절대반대 ②고시자주독립요구 ③민족진영의 대동단결요구④미군정과 협력 ⑤매국노 소탕등.
이날의 대회와 시위를 격려하기 위하여 탁치반대 단결 총 동원위원회에서는 백남훈씨, 독립촉성 중앙청년연맹에서는 김창혁씨가 나와 축사를 해주었다.
이승만박사는 돈암장에서 윤치영비서실장을 통해 기자단에게 『탁치는 계속 거부하고 나가야 한다』고 성명하고 『반탁학생「데모」는 우리민족의 애국심과 조직력을 중외에 여실히 표명한 행동』이라고 격려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대학전문을 선두로 한 행진대는 남녀중등학교, 일반단체를 순서로 해서 서울운동장을 출발, 동대문-종로-안국동-군정청(중앙청)앞-광화문을 거쳐 경교장(현고려병원)으로 해서 남대문까지 갔다.
시위행진을 마친 학생간부들은 반탁운동을 확대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까지 강력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다시 정동예배당에 모여 「반탁 전국학생 총연맹」을 결성했으며 위원장에는 내가, 부위원장에는 이동원(연전) 김덕순(세의전)이 선출됐다.
연맹본부는「세브란스」학교당국에 교섭하여 서울역앞 세의전회내에 있는 별관에 설치했으며 총무·조직·관전·오양·동원·후생·감찰·여자부·중등부등의 부서를 두었다.
1월7일의 반탁학생대회와 시위는 1월3일 좌익제가 찬탁으로 돌변한 이후에 처음 가진 민족진영의 반탁대회였다.
이 대회에 뒤이어 1월10일에는 6개단체인「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독립촉성중앙부인회」, 「한국애국부인회」,「주선여자국민망」, 「유학생동맹」, 「반탁전국학생총연맹」등에서 각1인씩 대표가나서「하지」장군을 유도 「호텔」로 방문하고 반탁결의를 다시 강조했다.
그때 연전출신 이고묵박사가「하지」장군비서로서 통역을 했다.「하지」사령관은『미국 국민은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며「트루먼」대통령도, 「번즈」국무장관도 이를 희망한다』고 밝히고는『막부회담은 결정적이 아니며 한나라가 전결할 수 없는 일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민주독립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1월12일에는 탁치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 주최로 다시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국민대회가 개최됐다.
10여만 시민이 모인 대회에는 그때까지 건준의 좌익에 업혔던 안재홍선생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개회사를 했다.
그는『자주독립을 위한 원조의 정신을 환영하나 탁치의 굴레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준비된 성명서와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는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종로를 거쳐 군공청앞과 광화문·서대문·서울역전등에 이르는「코스」였다. 물론 이날도 반탁학련의 학생들이 연오의 선두에 섰다.
미·소련군대표의 회담을 앞두고 나타낸 이같은 3천만민중의 강력한 반탁행동은 전국의 도와 시·군등 방방곡곡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특히 반탁학생단체, 부인단체, 노동단체, 청년단체, 문학단체, 교육단체등에서 자발적인 반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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