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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속의 「온건」견지…포 군부-NYT지가 분석한 그들의 정치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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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좌우파 간에 격렬한 투쟁이 진행중인 「포르투갈」사태의 열쇠를 쥔 궁극적인 주역은 군부이다. 따라서 군부가 전체적으로 어떤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집단이 품고있는 소망과 좌절감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포르투갈」사태의 종국적인 귀결을 가름하는데 핵심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다음은 「뉴요크·타임스」특파원이 보낸 현지 발 분석기사를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포르투갈」군부는 「포르투갈」의 변혁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그들의 혁명적인 언사보다는 훨씬 온건하다. 공산당의 지도 아래서든, 군부 그들 자신의 지도 아래서든 일종의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이룩하려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 분야에서 점진적인 정책, 민주적인 다수정당제의 유지를 옹호하는 군부세력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엄격한 획일주의 반대>
군부는 공식으로 사회주의의 입장임을 밝혔지만 이곳에서 한창인 논의로 미뤄볼 때 사회주의도 각양각색임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중국적으로 기본적 자유와 여론의 다양성을 소멸시킬 엄격한 획일주의,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거추장스런 관료제의 일당 국가를 후원할 의도가 아닌 것 같다. 장교단의 압도적인 다수는 가장 불만을 많이 표시해 온 중간 및 중하계급 출신이다.
이들은 사회당이나 인민 민주당과 같은 기성 정당들을 통해서 그런 불만을 표시해 왔다. 이러한 불만은 「포르투갈」의 3분의2를 차지하는 북부지역의 거의 모든 소도시에서 공산당
과 공산당 동맹과의 본부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다수의 장교들은 이 북부지역 출신이다.
극소수의 경제적·정치적 특권층은 그들의 자제를 전통적으로 군사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특권층의 젊은이들은 「리스본」「오포르토」「코임브라」에 있는 대학이나 해외로 유학을 가서 보다 명성 높은 사업이나 전문직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군사학교는 소도시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넉넉지 못해 3대 도시의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청년들로 충당되어 왔다. 중소 지주와 장사꾼의 가문에서 장교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이었다.
1961년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식민지 전쟁이 질질 끌자 이런 계층에도 군인으로서의 출세가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교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정부는 60년대 후반부터 대거에 「밀리치아노」로 알려진 예비 장교단올 창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포르투갈」대학생의 대다수는 급진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 당시 지하 운동을 하고 있던 공산당은 대학생들 사이에, 그같은 경향의 사상을 부리는 가장 강력한 조직이었다. 대학생들을 군대에 끌어들인 것은 공산주의자와 다른 급진파들을 장교단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나중에 쓸모가 있을 세포 조직을 만들기 위해 대학생의 인대를 의식적으로 조장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군부가 우익정권(「살라자르」 및 「카에타노」의 구정권)에 등을 돌린 것은 본래 식민지 전쟁의 피로 때문이었다.
1973년 여름 봉급과 승진 같은 직업적인 문제를 계기로 심각한 불평이 처음으로 터져 나왔다. 정부측이 장교 수를 채우기 위해 정규 장교가 몇년이나 걸려 획득할 수 있는 특권을 예비 장교들에게도 부여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막연히 사회주의 동경>
그 당시는 어진 사상은 물론이고 모든 정치 이론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포르투갈」국내 및 해외 식민지의 병영 안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토의가 전개됨에 따라 정치사상이 정면으로 「클로스업」되었다.
우파 정권은 3군에 반공사상을 깊이 주입하려고 노력했었다. 이러한 예방접종 탓으로 다수의 장교들과 사병들은 미국의 영향력에 반발하듯이 마련의 지배권에 대해서도 깊이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대한 감정은 별개의 문제다. 이번 여름 일단의 해군 병사들에게 강의를 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파시스트」정권을 넘어뜨리면 그 정반대 체제를 받아들이게 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시즘」이다.』
공산주의가 적이라고 들어온 장교들은 「포르투갈」내부의 그들 주변에서 별로 매력적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권이란 것이 억압적인데다가 자본주의란 것도 아주 미숙해서 소수의 가문과 금융「그룹」의 손에 집중되거나 저임금으로만 지탱할 수 있는 낙후되고 비능률적인 회사들이 산재해 있었다.
74년4월25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래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갖지 못한 채 다만 막연하게나마 일종의 사회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들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장교들은 국가의 민족적 독립성을 중요시하고 있고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와 너무 밀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양자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장교들은 그들이 맞싸운 「게릴라」운동의 정치적 단결과 효력에 감명을 받았다.
「모잠비크」해방 전선, 「기니」독립당, 「앙골라」인민 해방전선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게릴라」전법에 매료>
오늘날 「포르투갈」에서 군부는 농촌지역의 낙후된 주민들의 문화적·정치적 자각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모잠비크」와 「기니」에서 「게릴라」들이 쓰던 인민동원 수법의 복사판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이 높거나 보다 직업적인 군인일수록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아닐망정 공산당에 대한 저항이나 적대감은 강하다.
소령 이상의 장교들은 모두가 종신 군인들이다. 대위 이하로부터 일부 예비장교들과 대다수의 중위·소위들도 직업군인의 범주에 속한다. 사병들 중에도 중·상사는 직업군인의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2등병과 하사들은 거의 전부가 징집된 사병들이다. 이 징집된 사병들은 일반대중의 사회적·정치적인 성분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발견되고 전혀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정치적 자각은 계급에 따라 높아지며 그럴수록 보수주의가 강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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