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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중간 보고-방동인<경희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문헌비고 해로조에서 우리 나라 연해 안의 간만 차를 지역적으로 4구분했다. ①서해안으로부터 전남 해남군 갈두포까지는 밀·썰물의 차가 가장 크고 ②갈두포에서 김해까지는 거의 같은 영향의 지역이며 ③김해∼울산 ④그리고 울산 이 동북은 전혀 간만의 차가 없다고 구분했다.
이번 답사에서 그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즉 서해안에서는 밀·썰물의 속력 4.5「노트」이며 최저 2「노트」를 이용할 수 있었고 남해안에서는 2.23∼1.8「노트」였는데 부산 부근에선 1「노트」미만이었다.
연안 항해에서 물때를 이용하기 위해 흔히 『삼토 삼룡수 삼사 일마시 양삼 원적이 월흑복…』이란 계산법을 쓴다.
이것은 아침6시부터 저녁6시까지의 만간 물때를 기억하기 좋게 노래화 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토는 묘시(6∼7시 사이), 용은 신시(8∼9시), 사는 사시 (10∼11시), 마는 오시(12∼13시), 양은 미시(14∼15시), 원은 신시(16∼17시)이다.
예를 들면 한 호가 인천을 출발하던 6월20일은 음력 11일이므로 3귀십 3용수 십3사십 1마시 십양의 3일 중 첫 날에 해당되며 이는 곧 미시초인 하오2시가 되는 것이다. 실제 2시 만조에 출항해 썰물을 타고 영흥도로 건너갔었다.
이번 목선의 속력은 흐르는 물이 아닌 경우 일본서 실험한 결과는 2「노트」였다고 하지만 한국식 노로 개체 한 뒤 정확히 측정한 바가 없다. 그러나 서해안에서 썰물을 이용하였을 때의 속력은 노를 젓지 않아도 어떤 경우는 2「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반면에 풍도 에서 물때를 못 맞추어 목적지 2백m를 앞두고 순식간에 5∼6백m 떠내려 간 일도 있으며 역수에 걸리면 전혀 전진이 안되었다.
우리 문헌에 연안 항해 중 난지점이 3개소로 지적됐는데 그중 이번에 ①서산 앞의 관장 목에서 안흥량을 잇는 곳과 ②석수영 앞의 울돌목을 통과했다. 목이 좁아 조류가 거센 지역으로 올돌목은 최고11.5「노트」, 조금(간조) 때는 6「노트」라 한다.
서해안의 하행은 반드시 썰물의 조력만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포구로 들어가려 한다든가 조류가 부적당해 외 돌아가려면 때때로 반대의 밀물을 이용해야 한다. 그것은 거리와 소요 시간 및 물때를 엄밀히 계산치 않으면 안 되는데 원산도에서 도둔곶 마량으로 들어갈 때 그런 삼각 항행법을 응용해 노 젓는 힘을 훨씬 덜었다.
삼각 항행법은 남해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도해 지방은 밀·썰물이 한층 복잡해 지도상의 섬의 생김새에 따라 물의 방향과 각도를 맞추려 했지만 틀린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런 경험의 결론은 항행이란 오랜 체험에 의거했으리라는 점이다. 일승 원인의 입당 구법 순례행기에서도 낮선 뱃길에 배가 뻘에 걸려 무수한 고난을 겪으며 고려 도경에서는 아예 당지 뱃길에 밝은 사람을 높은 급료를 주고 안내 받았다고 했다.
우리 나라는 「리아스」식 해안과 다도해를 갖춰 어디나 좋은 포구들이다. 이번 목선처럼 속도가 느리고 한물(6시간)에 제한되며 수시로 비바람에 대피해야 할 형편에선 그런 해안이 제격인데 그 반면 지역 해로에 밝은 인도자를 필요로 한다.
요컨대 옛 항로는 지역 주민들의 생활권의 연결이다. 자기 생활권을 벗어날 때는 그곳 주민으로부터 상세한 안내를 받아 생활권을 연결했을 것이다.
이것은 연안만이 아니고 중국·일본으로 가는 원양에서도 마찬가지 원리라 생각되며 혹은 생면부지의 곳에 표착 함에 따라 뜻밖에 항로 지식을 확대했을 것이다.
이번 낯선 지역에서 어려웠던 고비가 두 세 차례 있었다. 군산에서 부여로 한 호를 예인해 갈 때 안내역의 「모터·보트」가 이곳 금강 하류의 수로 지식에 불충분하여 암초에 걸리자 급류에 휘말린 목선과 부딪쳐 전복될 뻔하고 목선의 노꽂이가 부서지는 등 한때 소동을 빚었다. 이 뱃길은 오늘날 거의 폐쇄됐지만 결국 수심이 낮은 금강에선 물길에 아주 밝아야 하고 또 밀물을 이용해 부여까지 거슬러 올라갔음을 터득했다.
전남 임자도에 밤에 당도했을 때에도 또 한차례 소동을 벌였다. 기착 지점을 찾지 못해 3시간을 헤매다가 모선이 뻘에 얹히고 목선과 부딪고 하다가 응급 정박하고 이튿날 새벽에 찾아갔었다.
자연 조건에 순응한 고대인의 연안 해로는 이번 한 호의 답사 「코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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