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속에서서-이시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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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귀가 트였으면
이 여름에는 두 귀가 트여
곧 은 소리들을 수 있었으면
밤하늘 변방에 뜬
의로운 소리 놓치지 말았으면
소리개 높이 날아
소리란 소리 다 파먹어도.
벼랑에 가 우뢰처럼 부서지는
소리 떼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았으면
묵은 귀 잘라버리고
햇볕에 잘 울리고
빗 속에서 싱싱한
귀가 돋았으면
눈이 트였으면
두 눈 맑게 트여
십리를 볼 수 있었으면
십리 앞을 걷다가 참수된 사람들
풀밭에 떨어진 번개같은 눈물 지나치지 말았으면
별 하나이 흘리는 눈물
아득한 땅에서 이는 연기
칼 빙 속에서 소리치는 크나큰 손들
덥석 잡을 수 있었으면
석은 눈 빼어버리고
나뭇잎에 닿으면 고요히 오므리고
쇠를 보면 한 자는 뛰쳐나올
커다란 눈을 가졌으면

<노트>
남도 들판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득한 흰 연기만 앞을 가려 눈을 뜰 수 없었다. 콩밭 속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서넛, 밭둑을 걷던 사람들이 두셋, 타는 눈을 들어 들판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69년도 신춘중앙문예시조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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