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신문의 새로운 명물 「맨발의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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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수년 전 모택동이 『의료의 중점을 농촌에 두라』고 한 후 대량 급조된 의사들이 중공전역에 퍼지면서 「적각의생」, 즉 「맨발의 의사」라는 새로운 말이 생겨 중공의 특수성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낱말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엔 「맨발의 기자」들이 「뉴스」보도에 크게 활약, 중공을 방문한 서방언론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맨발의 기자」는 공장의 노동자, 인민공사의 농부, 탄광의 광부, 학생 등 전국각지 각계각층에서 자기 일에 종사하면서 자기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기삿거리를 취재해 소속 신문사에 송고하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자들이다.
고등교육을 마친 다음 기자채용시험과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적으로 신문제작만을 담당하는 서방의 기자들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맨발의 기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뛰고있는 신문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처음으로 알린 상해의 일간지 문회보.
여기엔 약 2천명의 「맨발」들이 있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뉴스」들을 즉각 본사에 알려주고 사회조사·독자와의 유대강화 등 다양한 임무를 해내고 있다.
지면이 4「페이지」인 문회보의 경우 기사의 반 이상이 그들에 의해 채워진다. 1면의 머리기사도 때때로 「맨발」의 것이 올라간다. 문회보는 그들의 활약으로 기사를 빠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편집 간부들은 자랑하고있다.
회사측은 65년에 15만부이던 문회보가 지금의 20만부로 확장된 것도 「맨발」들의 공로라고 말하고 그들의 수를 더 늘릴 계획이라는 것. 전문편집진은 「맨발」의 1할도 못되는 1백50명뿐이다.
「맨발의 기자」가 제도화된 것은 『신문은 어디까지나 인민의 것이며 따라서 인민에 의해 인민 속에서 제작돼야 한다』는데 이론적 근거를 두고있다.
이 때문에 중공서는 비록 직업기자라 해도 6개월 이상 간부학교에 들어가 혁명사상을 공부한 다음 농촌에 파견되어 일정기간 농민들과 함께 육체노동을 한 후 신문제작에 참여한다. 「오일·쇼크」이후 각국의 「매스컴」이 용지값과 인건비의 폭등으로 큰 타격을 받고있는데도 중공의 신문들이 건재한 것은 「맨발」들의 공로라고 중공을 다녀온 서방언론인들은 말하고있다. <외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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