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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다가야」에서(2)|<제자=이은상>|노산 이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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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는「보디」나무 그늘 밑, 불타가 앉았던 자리라고 전하는 금강보좌 앞에서 잠깐동안이나마 불타의 성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불타의 성도에 대해서,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스님 네와 신도들이 의혹의 문답을 주고 받는 것이 있다.
말하면 6년의 고행을 허사로 돌리고 일어선 불타가, 금시 돌아서서「보디」나무 아래 앉아 겨우 77일만에 어떻게 그 같은 대각을 이룰 수가 있었겠느냐는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스님 네 들은 거기에 불타의 본 생을 연결시켜 대답해 왔던 것이다.
말하면 불타가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금시 졸지에 성 도한 것이 아니고 전생에서부터 몇 번이나 거듭거듭 생을 바꿔서 수행을 쌓고 쌓은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불타본생경의 본생이란 말은 범어「쟈다카」를 번역한 말로서, 불타의 전생에 수행하던 온갖 이야기들을 적은 경 문이거니와, 인생이란 결코 현재 누리고 있는 현세만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과거세로부터 계속해 와서 미래 세에 물려 가는 일관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특히 인도민족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범망경 가운데「불타가 사파 세계에 태어나서 종 생을 교화하기 무릇 팔 천 번이나 했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같은 불타 본 생의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전등 록에 온주의 영가선사가 육조 곁에서 하룻밤 자고 깨달았기 때문에「일숙각」이라는 문자가 생긴 것을 적어 둔 것이 있거늘, 하물며 유일 동안의 지극한 좌선으로 깨달은 불타의 행적이야 무엇이 그리 이장할 것이랴.
불타가 여기서 성도 했다는 말은「다르마」(법, 진리)를 깨달은 것을 이름이다. 큰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불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그가 바로 불타인 것이니, 불타가 따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불타가 될 수 있다는 그것이 바로 불타의 진정한 교 법이기도 한 것이다.
불타만이 성인이 아니다. 모든 보살들이 모두 다 성인인 것이다.
열반 경에
『불살 고을 성인이라 일컫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거룩한 진리(법)를 가긴 이들이기 때문이다』
한 것을 보면, 진리를 파악한 이는 누구나 성인의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음을 뜻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엄 경에
『성인과 범인이 두 길이 아니다』(성범무이로)라 한 것이 바로 그 소식을 명확히 일러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들 모든 범인이 거기에까지 가야겠다고 원하고 다짐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사홍 서원의 뜻이요, 또 그 같은 서원과 수행 속에서 참 인간의 보람찬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보디」나무 큰 그늘 밑에 앉아, 손으로 나무 등치를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옛날 「아쇼카」왕의 공주「상가미트라」아가씨가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너무도 감격스러워서「보디」나무 가지하나를 꺾어 가지고「실론」으로 가서「아누다라푸라」시에 심으면서 화려한 예식을 거행했었다는 것을 그려보기도 했다.
내야 어찌 이 귀중한 나무 가지를 꺾을 수가 있을 것인가. 잎사귀 및 잎쯤은 따 가지고 가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었다. 문득 안내하는 승려가 달려오며
『떨어진 것을 줍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따지는 못하는 법이오』하는 말에 나는 어떻게나 부끄러웠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뜻을 알아주는 듯, 바람결에 나무 잎들이 떨어지는 데는, 또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랐다.
「보디」나무 아래서
정각을 이루신 데라
발 벗고 꿇어앉아
금강 좌에 손을 모으자
때맞춰 나무 잎 우수수
바람결에 떨어지네
떨어진「보디」나무 잎
주섬주섬 줍는 뜻은
품고 가 상머리에 놓고
아침저녁 바라보면
거기서 부처 되는 길이
열릴는가 해설 네.
나는 손에「보디」나무 잎사귀들을 욕심스레 한 움큼 쥐고 문득「보디」나무를 쳐다보다 말고 노래 한 장을 다시 읊었다.
내가 깨닫는다면
「보디」나무가 따로 있나
소나무 잣나무가
모두 다「보디」나무지
내 앉는 짚방석 방바닥이
거기마다 금강 좌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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