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랑스」국제문제연구소 분석|「유럽」에 준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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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전쟁은「베를린」봉쇄와 중공의 승리로 야기됐던 국제긴장이 가라앉기 시작한 때의 일이었다. 당시「유럽」은 독일이 분단되고 소련이 핵 강대국으로 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비교적 안정돼 가고 있었다. 중공의 승인과 「유엔」가입 문제를 둘러싸고「런던」과「워싱턴」은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였으나 한국전쟁 초기의 미국정책은「런던」의 완전한 동의를 얻고 있었다. 전쟁발발 전에는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처럼 영국이나「프랑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유럽」과 인지문제 등으로 딴 곳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권력투쟁이 평화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0년 6월7일 평화 안을 제시한 북괴의 행동도「런던」과「파리」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6월25일 북괴가 38선을 넘었다는「뉴스」는「파리」와「런던」에서 경악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사행동의 발단이 소련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초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북괴가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점에서 즉각적으로 끌어낸 결론은 소련이「베를린」과「그리스」등에서 시련을 겪다가 북괴라는 중간매개 집단으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련의 행동은 극동에서 그칠 것인가, 아니면「베를린」과「발칸」으로 확대될 것인가가「런던」과「파리」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격을 결정한「트루먼」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구주의 연대의식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트루먼 반격 결정에 안도>
미국이 서독의 재무장을 제기한 것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는 사실은 영·불이 얼마나 구주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까 를 우려했느냐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동부「유럽」에 주둔한 소련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낭설이 갑자기 나돌기도 했다.
영국과「프랑스」의 근본 목적은 한국전의 국지화였다. 그들은 작전기간이 장기화하여 전쟁의 국지화가 불투명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서방이 소련을 남침의 책임자로 규정한 것은 6월29일 미-영이 남한에서의 북괴작전을 중단시키기 위해 소련이 즉각 개입하라고 요구했던 각서에서도 볼 수 있다. 소련은 이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안절부절 못했다는 것은 7월7일「모스크바」주재 영국대사「데이비드·케리」경과 소련 부 외상「그로미코」의 회담에서 확인된다. 「그로미코」는 한반도의 적대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소련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희망하는가를 밝혀달라고 영국 측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접촉을 유지하고 대화의 시작을 희망했던 것이다.
영-소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반도의 전투가 가열되고「유엔」군이 개입할 때 「모스크바」와 단독으로 타협을 모색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런던」은 이상 더 대화를 계속할 수 없었다.
7월16일「네루」는「스탈린」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전쟁의 국지화와 소련의「유엔」 안보리 복귀, 중공대표의 안보리참석을 제안, 한반도 문제가 안보리에서 신속히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스탈린」은『나는 귀하의 평화 안에 만족한다. 중공을 포함한 5대강국이 참석한 안보리에 한국국민 대표를 출석시켜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미의「아주 우선」에 우려>
미국은「네루」의 제안에 두드러지게 불쾌감을 표시하고 그것은「모스크바」의 장난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애치슨」국부장관은「네루」 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토의에 앞서 북괴군이 38선 이북으로 철수해야 하며 북괴는 침략자로서의 강력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서방측의 일방적 승리를 원하는 미국 측 의도를 읽고 이는 정쟁의 종국적 처리를 어렵게 한다고 불안해했다. 영국은 미국의 중공승인, 중공의 「유엔」가입, 대만문제의 일방적 처리 등이 극동문제해결과 화해의 정착에 불가결하다고 판단했으나 이를 제안하기에는 정세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프랑스」도 영국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불은 소련의 위협에 대응, 미군을 구주에 계속 유지키 위해 그들의 견해를 바꾸어 미국에 동조했다.
특히「프랑스」는 국내 공산분자의 위협이 점 고했고 호지명과의 전쟁도 미국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프랑스」는 한국문제에 대한 독자성을 가질 수 없었다.
영-불이 우려한 것은 미국의 고립주의와 「아시아」 우선 정책이었다.「맥아더」장군에 의해 상징된 미국의「아시아」우선 정책은 미국 서부지역 특히「캘리포니아」등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 주역은 「차이나·로비」와 긴밀했던 공화당소속 상원의원「늘랜드」였다.
자유중국의 본토상실을 가슴 아파하고 극동이야말로 미국의 미래에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는 이「그룹」은「맥아더」장군의 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맥아더」는 북괴의 공격은「모스크바」의 팽창주의가 가장 과격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자유세계는 차제에 침략자를 단호히 응징하고 한반도의 통일, 일본과 서독의 재무장을 포함한 자유세계 방위기구의 창설을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유럽」과 중동·동「아시아」에 장기적인 방파제를 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만주 공격하면 참전">
한국을 방어 권에서 제외하고「유럽」에 특전을 부여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비판으로「트루먼」대통령은 궁지에 몰렸다. 그는 점점「늘랜드」파의 포로가 되었다가「맥아더」의 파면으로 겨우 궁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진격하자 전쟁의 국지화를 희망하는「유럽」동맹국들과 인도는「워싱턴」이 일축한「네루」안을 표면화시켜야 했다.
「맥아더」노선이「유럽」안보와 세계평화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인식은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 「유엔」군이 철수하던 50년 10월말 완전히 뿌리박게 됐다.
영-불은 중공을 자극치 않기 위해 압록강 수풍발전소의 사용과 보호 및 한-만 국경의 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한 협정을「워싱턴」으로부터 얻어내려 했으나 거부됐다.
중공은 11월5일 진격을 중단하고 한반도와 대만문제를 토의키위해 안보리에 참가하고, 미국이 중공을 승인하고 대만원조를 중지하며, 7함대가 대만해협에서 철수할 것을 조건으로 비무장지대 설치안에 동의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은「유엔」군이 한-만 국경선에 완전히 도달한 뒤에 토의에 응해야 한다는「맥아더」장군의 주장을 중공에 전했다.
당시 「맥아더」는 한달 안에 완전히 승리할 것으로 전망하고 최후의 공세를 폈으나 중공군에 의해 저지됐다.「유엔」군 방위선의 중앙에 위치했던 한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지자 미군은 후퇴해야만 했다.「맥아더」는 만주폭격을 주장했고「워싱턴」에서는 핵무기 사용이 거론됐다.
미국은 세계긴장의 악화를 구실로 서독의 가속적인 재무장과 NATO 가입을 허용토록 영-불에 압력을 가했다. 1942년과 44년의 조약으로 소련과 연결돼 있던 영국과「프랑스」는 소련의 의사가 밝혀지기 전에는 서독의 재무장을 승인하기 어려웠다.

<핵사용 설에 크게 놀라>
소련은 적어도 독일이 비무장상태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동독에 관한 타협에 응할 준비가 돼 있고 중공의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독일에서 구입할 의사가 있음을 여러 가지「채널」을 통해 서방측에 알렸다. 50년 11월6일 소련은 독일문제에 관한 회의를 서방측에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만주폭격과 원자무기 사용 설에 경악한 것은 누구보다 영국과「프랑스」였다.「애틀리」 영국수상은 12월초 미국을 방문, 이를 만류했다. 이보다 앞서 소련은 만주를 폭격하고「유엔」군이 두만강까지 접근하면 한국에 참전할 것이라고 미국에 비밀리에 통고했었다.
미국의 모험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인도와「캐나다」및 EEC 각국의 무조건지지를 받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의 중공승인과 중공의「유엔」가입 없이는「아시아」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따라서 한국전은 국지전에서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어 구주제국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국과 구주 국과의 논쟁에서 미국은 승리했다. 북경과의 협상개시 조건들을 거부한 미국은 51년 2월1일「유엔」에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그후 수십 년간 중공을 고립시키는 포승이 됐다. 미국은「아시아」와「유럽」의 자유국가들을 영도하고 일본을 자기체제에 묶어 두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외교 정책의 기본적인 축이 동서양진영의 긴장을 적당한 수준에서 유지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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