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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라즈기르」에서(1)|<제자=이은상>|노산 이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나는「라즈기르」(왕사성)거리를 거닐면서「빔비사라」왕(빈비사나 왕)의 불교귀의와 아울러, 그의 아들「아쟈타사트루」왕(아합세왕)이 자기의 죄를 참회한 후 오히려 불타의 교단을 위해 큰 공로를 바쳤던 것을 헤아려 보았다.
불타 열반 후에 생전의 제자비구들이 모여서 불타의 교 법을 처음으로 토론 정리했던, 이른바 제1차 결집이 바로 그의 왕대, 모 바로 이 곳에서 이루어졌었다는 것은 실로그와 이 땅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결집이란 말의 본말은「상기티」로서,「다함께 왼다」(합송) 뜻이거니와, 인도문학사를 상고하면, 불타 당시부터 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인도 고대민족의 사고방식으로는 거룩한 이의 말씀을 글자로 적는 것은 불경스런 짓이요, 입으로 외는 것을 옮게 여겼던 것이다.
불교역사상 불타의 교 법과 계율 등에 대한 결집은 무릇 네 번이 있었는데,
제1차는 불타열반 4개월 뒤에「라즈기르」에서 5백 명이 7개월 동안 정리했고,
제2차는 불타열반 l백년 뒤에「바이살리」(비사리)에서 7백명이 8개월 동안 정리했으며,
제3차는 불타열반 2백30여 년 뒤「아쇼카」왕(아육왕)때에「파트나」(화씨성)에서, 1천명이 9개월 동안 정리했고,
제4차는 불타열반 4백년(흑은 6백년)후, 「카니스카」왕(가함색가 왕)때에,「카쉬미르」(가섭미나)에서, 5백 명이 무려 12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최후로 정리했던 것이다. 그 같은 네 번 결집 중에서도 제1차 결집을 행했던 곳이 이 곳이라「라즈기르」는 실로 불교역사상 잊지 못할 곳이거니와, 실상 그보다는 불타자신이 성도 한 뒤,「사르나트」(녹야원)로 가서 첫번 설법을 행한 다음, 다시 이곳 왕사 성으로 와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한 것으로써 더 유명한 곳이 된 것이다.
영취산의 범어 이름은「그리드라쿠타」요, 파리어로는「깃자쿠타」라 하는데, 한문 경전에 「기도굴다」라고 쓴 것이 바로 그것을 음역한 것이며, 영취산이란 것은 그것을 뜻으로 번역한 것이요, 현재 이 지방사람들은「차타」산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의 유래는, 산봉우리가 독수리(당)처럼 생겼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 산에 독수리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도 하거니와, 우리나라에까지 그 이름이 실려와, 통도사 뒷산을 영취산이라 하고 신라 구산 선문의 하나인 통효대사 범일의 도굴산도 그 이름을 따온 것인데, 그의 제자인 낭원대사 비문에「오대에 이르러 통효 대사께 배알했다」한 것을 보면, 도굴 산이란 오대산을 이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불타의 미묘한 법문! 불가사의한 것이기에 묘요, 불타 일대를 통하여 행한 모든 설법이 모두다 묘법이지만, 그 중에서도 묘법연화경이란 이름 그대로, 가장 중요한 경문을 설법한 곳이 이곳 영취산이었던 것이요, 더욱이 불타의 으뜸 계승자인「마하카사파」(마가가섭)를 얻은 곳도 여기요, 또 불타의 십대제자 중 지혜 제일로 손꼽는「샤리푸타」(사리불)와, 신통 제일로 헤아리는「목갈라나」(목건련)들도 모두 이 당산회상에 같이 앉았던 사람들이다.
나는 특히 법화경에 실려 있는「화택삼차」를 비롯하여「장음궁아」와「약초」등 유명한 일곱 가지 비유를 생각하고, 중생을 법계로 증입 시키려는 불타의 광대한 자비심을 다시금 느끼면서「라즈기르」의 시중을 벗어나, 남쪽으로 얼마 아니하여 산성 앞을 지나갔다.
이 성이 바로「라즈기르」성이다. 이 성곽은「빔비사라」왕이 쌓은 옛 성과 그의 아들 「아쟈타사트루」왕이 쌓은 새 성, 두 가지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새 성인 채로, 현재 성곽의 유적으로는 바깥벽의 폭이 5m, 총 연장 40㎞나 되어, 현재 인도 국내에서는 가장 오랜 옛 성이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상고해 보면 기원전 5세기 말엽「카카바르닌」왕 시대에 이르러, 수도를 「파트나」근교로 옮겼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이 황폐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8백년이 지난 뒤, 기원 후 5세기 초, 동진의 법현이 여기를 순례했을 때는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을 그의 불국 기에서 읽을 수 있다.
법현은 본시 중국 무양 사람으로, 속성은 번씨(공씨)요, 서기399년에 인도로 건너와서, 특히 이곳「마가다」국에서는 3년 동안 머물렀으며, 10여 년이나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서기 413년에 돌아가, 역경사업에 종사한 후, 82세로 입적한 이 인데, 그가 남긴 불국 기야말로 이 방면 저술의 효시이었던 젓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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