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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우먼' 핼리 베리 "훌륭한 패자 안 되면 승자도 될 수 없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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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왼쪽부터 제작비 10달러도 안 되는 래지상 트로피, 최악의 배우로 뽑힌 윌 스미스 부자, 샌드라 불럭과 핼리 베리, 실베스터 스탤론, 최초로 시상식에 참석한 폴 버호벤. [중앙포토]

제5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1981년 3월 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의 한 가정집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광고·홍보업을 하는 이 집 주인 존 윌슨과 그의 지인들이었다. 영화광인 윌슨은 친구들과 아카데미를 재미있게 즐길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1달러를 주고 보기도 아까운 영화’에 상을 주자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즉석에서 카드 게임을 하던 탁자를 단상으로, 빗자루를 마이크 삼아 시상식이 열렸다. ‘최악의 작품상’은 좀 전까지 윌슨 자신이 보고 있던 영화 ‘음악은 멈출 수 없어’에 돌아갔다.

 윌슨은 시상 내용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돌렸는데 몇몇 지역 신문에서 기사가 나며 입소문이 돌게 됐다. 이제 해마다 최고의 할리우드 영화·배우에 시상하는 아카데미상과 더불어 또 하나의 화제를 제공하는 골든 래즈베리(Golden Raspberry)상(통상 ‘래지(Razzie)상’이라고 부름)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 인천’ 포스터.

 래즈베리는 ‘산딸기’란 뜻이지만 ‘혀를 입술 사이로 진동시키며 내는 야유 소리’란 뜻도 있다. 우리의 ‘메롱’과 비슷한 모양·의미다.

 매년 아카데미상 전날 치르는 래지상 시상식은 현재 9개 부문을 선정한다. 최악의 작품·감독·각본상, 최악의 남녀 주연상과 조연상, 최악의 커플, 최악의 속편&리메이크다. 수상 결과는 주요 매체에 보도돼 전 세계 5000만 명 이상이 수상 결과를 접한다.

 수상자는 골든 래즈베리상 재단 유료 회원들이 온라인 투표로 결정한다. 재단 웹사이트(www.razzies.com)에 들어가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다. 올해는 미국 등 16개국에서 800명의 회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지난 1일 발표된 제34회 래지상에선 코미디영화 ‘무비 43’이 최악의 작품·감독·각본 3개 부문을 석권했다. SF영화 ‘애프터 어스’ 에 함께 출연한 윌 스미스 부자는 최악의 남우주연과 조연·커플상을 받았다. 주최 측은 영화에서 이들이 지구에 불시착한 내용을 빗대 “족벌주의(nepotism) 행성에 불시착했다”고 평했다.

 역대 수상작을 보면 비교적 잘 알려진 영화가 많다. 인지도가 높아야 욕도 먹게 되는 것이다. 애덤 샌들러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잭 앤 질’(2011)은 시상식에서 사상 최초로 특별상 포함 10개 전 부문을 석권한 기념비적 영화가 됐다. 샌들러가 남녀 1인 2역으로 주연남우상과 주연여우상을 휩쓸었고 연기파 배우의 대명사 알 파치노까지 평소 그답지 않은 영화에 출연해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한국과 관련된 작품으론 ‘최악의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받은 ‘오! 인천’(1982)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소재 전쟁 영화인 이 작품은 고 문선명 통일교 창시자가 5년의 제작 기간과 당시 제작비론 엄청난 거액인 4410만 달러를 들여 고작 190만 달러를 벌었다. 테렌스 영(감독), 제리 골드스미스(음악), 로런스 올리비에(맥아더 장군 역), 남궁원, 이낙훈 등 할리우드와 한국을 아우르는 초호화 캐스팅에 칸 영화제에 출품까지 했지만 폭풍 같은 혹평에 휩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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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지상에 단골로 거명된 배우론 실베스터 스탤론과 케빈 코스트너, 마돈나, 보 데릭, 애덤 샌들러, 린지 로한 등이 있다. 스탤론은 80년대와 90년대 최악의 남자배우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상자들은 ‘상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며 시상식에 참여할까. 당연히 아니다. ‘배틀필드’(2000)로 그해 래지상을 휩쓴 존 트래볼타는 “그딴 영화제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반응했다가 윌슨으로부터 “지난번 후보에 올랐을 때도 같은 소리 했잖아”라는 대꾸를 받았다. ‘갱스터 러버’(2003)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벤 애플렉은 다른 이를 통해 전달받은 트로피를 토크쇼에 나와 부숴버렸다.

 시상식에 최초로 참석한 이는 폴 버호벤 감독이다. ‘쇼걸’(1995)이 6개 부문을 수상한 자리에 참석해 “모국 네덜란드에서도 ‘쓰레기’ 소리를 들었는데 여기서도 듣다니, 미국은 이제 제2의 조국”이라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캣우먼’(2004)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핼리 베리도 참석해 “훌륭한 패자가 될 수 없다면 훌륭한 승자도 될 수 없다” “(매니저에게) 다음에 영화 제의를 수락할 땐 먼저 대본 좀 읽으세요” 등의 말로 식장을 즐겁게 했다. ‘스티브에 관한 모든 것’(2009)으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된 샌드라 불럭은 시상식에서 관객들에게 영화 DVD를 나눠주며 “내가 왜 이 영화로 상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봐요. 안 그러면 상을 반납할 거예요”라고 소리쳤다. 그는 다음날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 ‘블라인드 사이드’로 여우주연상을 받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윌슨 등 래지상 관계자들은 대부분 할리우드 주류에 비판적인 영화업계 종사자들이다. 이들은 할리우드가 예술가가 아닌 은행과 투자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어 형편없는 영화들이 이토록 양산된다고 비판한다. 또 ‘비슷비슷한 배우들이 모여 시시덕거리고 거드름 피우는 무대’라고 아카데미상을 꼬집는다. 그들은 아카데미상을 그냥 ‘다른 시상식(OTHER Award Show)’이라 부르며 놀린다.

 물론 래지상이 오스카에 필적할 권위를 가지진 못한다. 윌슨은 ‘대부3’(1991)에 출연한 소피아 코폴라가 자신들이 준 상(최악의 신인과 여우조연) 때문에 연기를 접고 연출·각본에 전념하게 됐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정도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아카데미가 말하지 않는 메시지를 래지는 던진다. 팬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래지상에 열광한다. 윌슨은 “오스카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가 완성했다”고 말한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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