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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간첩사건 증거 조작, 몸통 제대로 밝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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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아온 중국 국적의 탈북자 김모(61)씨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국정원의 개입을 시사하는 유서를 남겼다. 이제 증거 조작은 진실게임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한 수사를 통해 그 몸통을 밝혀내야 할 대상이다.

 ‘국정원 외부 조력자’로 알려진 김씨는 간첩 혐의로 기소된 유우성(34)씨 출입국 기록 관련 중국 싼허(三合)세관 명의 공문을 국정원에 전달한 인물이다. 검찰에서 세 차례 조사받은 그는 지난 5일 모텔에서 자살을 시도하기 앞서 아들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대한민국 국정원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있다”고 했다. 이어 “2개월 봉급 300X2=600만원,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원과 수고비”를 거론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서는 “지금 국정원은 ‘국조원’(국가조작원)입니다. ‘국민생활보호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맞게 운영하세요”라고 적었다. 앞서 김씨는 검찰에서 “국정원 직원의 요청으로 싼허세관 공문을 위조해 넘겨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어제 검찰이 그간의 진상조사 체제에서 수사 체제로 공식 전환한 것도 범죄 혐의가 포착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김씨가 상당 기간 협조자로 활동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위조 여부는 알지 못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도 속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정황과 진술 등으로 볼 때 국정원이 과연 위조 사실을 몰랐는지 의문이다. 국정원은 지금이라도 김씨에게서 문서를 입수한 경위를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게 조직을 위하는 길일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진상 공개 없이는 국정원이 문서 위조를 요구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증거 조작은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법치주의의 기반을 허무는 중대 범죄다. 국가기관이 증거를 위조한다면 대체 국민의 인권은 어떻게 보장받는다는 말인가. 특히 국가보안법은 보안법 사건에서 증거를 날조·은닉한 경우 엄벌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은 “검찰·국정원 측 공문서들은 위조된 것”이란 주한 중국대사관 회신을 받은 후에도 어정쩡한 태도로 의혹을 키운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김씨가 모텔 벽에 피로 쓴 ‘국정원…’ 글자가 지워진 경위도 석연치 않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이 아직도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시절의 수사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확인해주고 있다. 대북 인적 정보망이 훼손돼서도 안 되지만 증거 조작 같은 일이 오히려 국가 안보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간첩 사건의 중요 증거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재판에 제출한 검찰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검찰은 국정원이 위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어느 선까지 지시와 보고가 이뤄졌는지 밝혀내야 한다. 만약 꼬리만 잘라내고 수사를 끝낸다면 특검 수사로 가는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