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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파라과이」의 목재 왕 최진곤씨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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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흔히 생각하지 않는 자연과의 싸움에 이미 10년을 불태운 「카아과수」 목재 생산 협동 조합의 다섯 한국인은 또 다른 이민 입지 「케이스」-.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국산 제재기에 걸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남미 「파라과이」의 원시림에 정착한 최진곤 (36)·강문석 (59)·김윤영 (57)·최두호 (38)·조광수 (31)씨 등 다섯 사람은 「협동」으로 오늘의 기반을 닦아 왔다.

<대미 수출엔 경쟁자도 없어>
「파라과이」의 동북부 지방 「브라질」에 가까운 「카아과수」는 이 나라 최대의 임산물생산지. 국토의 4분의 1이 원시림에 싸인 산림지대로 지난해 여름에 완성된 「아스팔트」를 따라 수도 「아순시온」에서 1백77㎞ 떨어진 오지에 들어서면 사방을 둘러봐도 아름드리 나무뿐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카아과수」 지방에만 원목을 켜는 제재소가 53개소로 늘어났고 인구는 1만여명으로 불었다.
최씨가 조합장으로 이끌고 있는 「카아과수」 생산협동조합 (Cooperativa De Poduccion Caaguazu)은 생산 실적이나 규모, 경영 방식에서 「카아과수」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파라과이」 전국에 산재한 1백50여개 공장 가운데서도 작년도 해외 수출 실적으로는 두번째. 74년 한해동안 1천2백만「달러」어치를 수출한 목재 생산국인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공장은 「파라과이」 목재인 연합회 회장 「스콜리니」씨가 경영하고 있고 최씨는 80만「달러」어치를 미국에 수출, 전체의 약 7%를 차지하고 있다.
최씨가 이 나라 목재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으로 3년 전부터 원목 l차 가공품을 미국에 수출하는 길을 터 아직까지 대미 수출에서는 경쟁자가 없이 독점 사업을 하고 있는 처지다.
이 공장에서 쓰고 있는 제재기는 놀랍게도 한국 제품. 톱날만은 「스웨덴」제를 쓰고 있지만 서울 K공업사에서 만든 국산 제재기의 성능은 외국재 못지 않아 지금도 54「인치」, 48「인치」, 42「인치」기계 등 3대로 원목을 켜고 있다.
「파라과이」에 한국 목재 이민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65년6월.
여느 이민이 착안하지 않은 때에 강씨 등은 제재기와 「디젤」 발동기를 가지고 「몬테」(삼림지대)에 제재 공장을 차렸다. 당시 먼저 이민한 최일복씨가 30㏊의 부지를 제공하고 강씨와 김씨가 기계 현물 투자로 동업 형식으로 발족되었다.
당시 「카아과수」 지방에는 제재소가 5개소 뿐으로 생산 능력도 미미하였다. 원주민들이 쓰는 기계는 50년이나 지난 고물로 능률도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등 마는 등 게을러 빠진 성격으로 적자 속에 허덕이는 형편이었다.

<처음엔 품삯 받고 원목 제재>
강씨 등은 우선 발동기와 제재기를 노천에 설치하고 나무를 켜서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거의 석달이나 걸려 공장을 짓기는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찾아오는 일거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한 산판을 가질 수도 없는 형편으로 독자적으로 사업 계획을 세우는 일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해 고작해야 품삯을 받고 원목을 제재해 주는 정도. 「파라과이」의 제재 단위는 「큐빅·인치」로 가로 1「인치」, 세로 1「인치」에 길이 1m가 단위 규격, 우리 나라의 칫수로는 17자 가량으로 「큐빅·인치」 당 제재 품삯은 「하드·우드」의 경우 1백∼1백20 「과라니」 (약 3백∼3백60원)이며 「소프트·우드」는 80「과라니」. 그나마 일거리가 없어서 가족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가져간 옷가지를 팔아 연명해야 했다.
당시 「파라과이」는 주로 이웃 「아르헨티나」에 원목을 수출하고 있었다. 워낙 산업이뒤떨어져 원목을 가공하여 가구 등을 만드는 공장도 없어 통나무를 그대로 수출, 완성품을 수입하는 처지였다. 따라서 1차 가공을 하는 제재소의 일거리도 보잘 것 없었다.
특히 66년5월 이후 남미 전체에 목재 불경기가 들이닥쳐 공장은 거의 휴업 상태에 빠졌다. 일곱 식구를 거느린 강씨는 살길을 찾지 못해 집단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다는 것. 이 때 우연히 끼어 든 사람이 최씨. 서울 연세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공부하던 최씨는 미국 유학 길에 「파라과이」에 들렸다가 처가에서 관계하던 제재소 경영을 맡게 되었다,

<원시림 개간에 세금 감면 혜택>
사업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최씨가 보기에도 이 공장은 경영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품삯 일을 해왔지만 원주민의 공장과 경쟁하는 입장에서는 일거리를 확보하기 힘들고 경쟁을 피하려면 새로운 수종을 개발하여 외국 수출의 길을 뚫어야 될 형편이었다. 다행히 최씨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최씨가 우선 착안한 것은 세금을 내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회사의 설립이었다. 이 나라에도 협동 조합이란 용어가 있는 것이 신기하지만 우리 나라의 그것과는 약간 틀린다. 농림 생산하의 협동 조합처란 기구에서 관장하고 있는 임업 협동 조합의 경우 뒤떨어진 원시림 개간 사업을 장려할 목적으로 사실상의 영리 행위에도 세금 감면의 혜택을 주고 있다,
최씨는 67년5월 농림성 허가 29호로 「카아과수」 생산 협동 조합의 설립을 인가 받아 제재기 3대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최씨가 처음으로 손댄 것은 그때까지 땔감으로 버리던 「와담푸」라는 원목을 1차 가공하여 미국의 가구 공장에 재료를 공급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 원조처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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