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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받던 탈북자, 호텔 벽에 '국정원, 국조원' 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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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시 공무원간첩사건 증거조작에 연루된 중국 국적의 탈북자가 5일 검찰 조사를 받고 나간 뒤 호텔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국가정보원을 향해 “도와준 나를 왜 죄인으로 모느냐”는 원망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정원을 개혁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객실 벽에 피로 ‘국정원, 국조원’이란 여섯 글자를 썼다.

 증거조작 수사를 지휘하는 윤갑근 대검찰청 강력부장은 6일 “탈북자 김모(61)씨가 5일 새벽 세 번째 소환조사를 마친 뒤 귀가해 머물던 서울 영등포 L호텔에서 오후 6시쯤 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커터칼로 목 부위를 그었으나 경동맥 등 큰 혈관은 다치지 않았다. 6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봉합수술을 받고 현재 생명엔 지장이 없는 상태다.

 김씨는 관인이 위조된 것으로 드러난 유우성(34)씨의 출입국기록 관련 중국 싼허(三合)세관 명의 공문을 입수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선양총영사관의 국정원 파견직원 이모 영사와 함께 지난 주말 검찰에 출두했다. 김씨는 3차 소환조사에서 “국정원 직원의 부탁으로 내가 싼허세관 공문을 직접 작성하고, 도장까지 찍은 뒤 넘겨줬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국정원의 증거조작을 시인하는 진술을 한 것이다.

 호텔로 돌아간 김씨는 5일 낮 12시50분쯤 자신을 조사한 진상조사팀 박영준 검사에게 “너무 죄송하고 무리하지 말고 건강관리 잘 하세요. 이제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박 검사는 곧바로 경찰 112에 신고했다. 5시간여 뒤인 오후 6시11분쯤 피를 흘리며 침대 곁에 쓰러져 있던 김씨를 모텔 종업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는 A4용지 4장짜리 유서도 남겼다. 박 대통령과 야당, 검찰, 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야당을 향해서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내용을, 검찰과 아들에게는 각각 “고맙다”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김씨의 자살기도 이유나 수법, 자해 현장이 훼손된 점 등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김씨는 국정원에서 중국 공문을 최초 입수한 사람이라며 검찰에 출두시킨 ‘국정원의 협조자’다. 신분도 조선족이 아닌 탈북자 출신으로 중국 국적을 나중에 취득해 한국·중국을 자주 왕래한 인물로 확인됐다. ‘꼬리 자르기’ 목적에서 검찰에 자진출두시킨 김씨가 예상과 달리 국정원에 불리한 진술을 하면서 국정원 측과 갈등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진상조사팀 관계자는 “검찰 조사는 우호적으로 진행됐다”며 “국정원 협조자인 김씨가 자신의 진술이 국정원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데 큰 압박감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자살기도 와중에 혈흔으로 직접 ‘국정원, 국조원’이라고 벽에 쓴 점도 의혹이다. 일부 네티즌은 인터넷에 “국가정보원은 국가조작원”이라고 비난했다. 조작의 책임이 국정원에 있다고 지목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텔 측은 “사건 직후 영등포경찰서 과학수사팀 등 경찰 10여 명이 와서 현장 채증과 감식을 끝냈고, 경찰에서 6일 오전 ‘청소하라’고 해 지웠다”고 말했다.

정효식·심새롬·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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