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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무효 소동 빚은 압구정 구현대아파트 입주자대표 회장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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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각 동 게시판에 붙은 입주자대표회장 선거 무효 공고문. 선거 기간 동안 특정 후보자를 비방하는 일이 벌어진 데다 대리 투표 의혹까지 불거져 선거 결과를 무효화한다는 내용이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선거는 무효를 선언하오니 주민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달 21일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각 동 게시판엔 입주자대표회장 당선 무효 공고문이 붙었다. 당초 이보다 앞서 지난달 18일 입주자대표회장 당선자를 공고하기로 돼 있었지만 선거 결과를 공표하는 대신 무효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은 거다. 정·재계 인사와 관계 고위직, 유명 연예인 등 3000여 세대가 모여 사는 대단위 부자 아파트 단지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번 선거는 현대아파트에서 두번째로 실시한 주민 직접 투표다. 그전에는 동대표끼리 모여 회장을 뽑는 간선 방식이었다. 그러나 2010년 주택법 시행령 개정으로 500세대 이상 아파트는 무조건 직선제로 입주자대표회장을 뽑게 되면서 2012년부터 이 아파트도 선거를 치뤘다.

문제는 2012년 첫번째 직선제 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재선을 노리고 재출마한 정모(66)씨에 대한 낙선운동이 벌어지면서 불거졌다. 선거 기간 내내 현(現) 정 회장을 비방하는 전단지가 뿌려지는 등 낙선운동 끝에 정 회장 경쟁자인 도모(73) 후보가 30여 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정 회장 측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사상 초유의 당선 무효 사태가 벌어졌다.

정 회장은 “전 입주자대표회장이던 신모씨가 선거기간 동안 나를 음해하는 전단지를 뿌리는 것은 물론 투표소 앞에 용역을 고용해 이런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들고 서 있게 했다”며 “공정한 선거가 아닌 만큼 결과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부 주민이 투표하러 갔더니 이미 본인 이름으로 투표가 이뤄져 있는 등 부정선거 흔적까지 있었다”고 덧붙였다. 선관위는 이런 주장을 인정했다.

신씨는 4년 전 입주자대표회장을 지낸 사람으로, 이번 선거에 출마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정 회장 낙선운동을 벌였다. 신씨가 주민에게 배포한 전단지는 정 회장과 그 측근이 신씨를 명예훼손한 끝에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씨는 “정씨는 나를 모함해 결국 명예훼손죄까지 받고는 되레 주민들에게 내가 위증죄로 곧 구속된다는 소문을 낼 만큼 부도덕한 사람”이라며 “이런 사람이 주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실을 알린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 경쟁자인 도씨를 도우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더욱이 부정선거를 도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이라 진실은 좀더 두고봐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입주자대표회장이 주민간 소송전을 불사할 만큼 대단한 자리라는 것이다.

법(주택법 시행령)이나 아파트 관리규약만 보면 회장 권한은 별로 대단하지 않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회장은 업무추진비로 매달 70만원을 받는다. 이권이 걸린 사항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엘리베이터 보수나 건물 도색 업체를 선택할 때는 입주자대표회원인 동대표들의 투표를 거쳐야 한다. 겉으로만 보면 봉사직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 사정을 들여다 보면 전혀 얘기가 다르다. 입주자대표회장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운영에 깊숙히 개입할 수 있는 자리다. 관리사무소는 주민 대표이자 관리소장·직원 임명권자인 입주자대표회장 지시를 무시하기 힘들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신씨가 도로 등에서 전단지를 배포하자 입주자대표회장 지시로 해명서를 동마다 게시했다. 신씨 주장을 담은 전단지는 관리사무소 측으로부터 부착불가 통보를 받았다. 원래 아파트 공고문 부착은 관리소장 권한이다.

비단 현대아파트뿐이 아니다. 대형 아파트 단지는 다 비슷하다. 송파구의 한 주민은 “입주자대표회의는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회장이 밤 늦게까지 중요 현안을 전혀 논의하지 않다가 의견을 달리하는 동대표들이 한두명씩 자리를 떠나면 측근 동대표들에게만 따로 연락해 세를 모은 후 원하는 방향으로 의결해 버린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송파구의 한 입주자대표회장도 “동대표가 아파트 운영에 대해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회의를 주관하는 입주자대표회장 의중이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밝혔다. 형식은 동대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회장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구현대아파트는 동대표가 30명(총 41개 동이지만 11개동은 동대표 출마자가 없거나 중도사임)이기 때문에 무슨 결정이든 과반수, 즉 16명의 찬성만 있으면 된다.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단지 입구에 붙은 명패.

서울시 관계자는 “아파트 주민이 입주자대표회의 운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주민 대다수가 무관심하다보니 회장과 그 반대 입장에 선 몇명이 싸우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에선 지난해 7월 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를 만들었다. 주민 요청을 받아 서울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의 관리 실태를 조사하는 곳이다. 설립 이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주민 요청이 들어왔다. 지난해만 325곳이다. 이중 시 차원에서 25곳, 자치구에서 47곳만 겨우 조사를 마쳤다. 강남·서초구는 각 4곳, 송파구는 6곳이 조사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덕기 서울시 지원총괄팀장은 “제한된 인력 때문에 한 달에 최대 두 곳까지만 검사할 수 있다”며 “올해엔 자치구별로 인력과 예산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요청이 많다는 건 그만큼 주민간 갈등이 심하다는 걸 보여준다.

상호 비방과 부정 투표 의혹으로 얼룩진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 선거는 사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해당 시·군·구 선거관리위원회에 일정 비용을 내고 선거 단속 및 투·개표 요청을 하면 된다. 그러나 현대아파트는 이번 선거를 강남구선관위에 요청하지 않고 자체 선관위를 꾸려 논란을 자초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창호 사무관은 “선거 유세 단속부터 투·개표에 드는 총 비용은 평균 300만원 정도”라며 “3000세대 단지라면 각 세대 부담 비용이 1000원에 불과한데 왜 자체적으로 선거를 하겠다고 나서 논란을 초래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번 현대아파트 선거 예산은 550만원이다. 이번달에 예정된 재투표를 하면 비용은 더 늘어난다.

조한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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