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7)<제45화>상해임시정부(42)|조경한(제자·조경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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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광복군>
1940년5월10일.
우리민족의 최대 정당인 한국 독립당이 창립됐다.
이것은 광복전선의 9개 단체가 민족적 사명감에서 순수하게 하나로 뭉친 것이다.
예비회의에서 내가 작성한 당헌과 당규를 약간 수정하여 그대로 통과시켰다.
이어 신당의 집행부가 즉각 구성됐다.
김구를 집행위원장으로 하고 조소앙·지청천 유동열 안훈(당시 나의 별명) 김학규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조성환 차리석 최동오 양우조 조시원 이복원이 위원으로 선출됐다.
지부를 중국각지에 두고 미주지역에는 우선 「하와이」에 설치했다.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정부를 보익하고 심지어 외교적으로는 정부를 대신하여 문서 및 물자의 거래를 관리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독립당의 역할은 중요했다.
임시정부가 손문의 중국임시정부로부터 「사실승인」을 받았을 때는 한·중 양국정부간에 직접거래가 있었다.
그러나 그후 양국정부가 많은 변천과정을 밟고 특히 우리임시정부가 저조기에 있어서는 쌍방간의 정식 거래가 침체 내지는 절연되다시피 했고 오직 사적인 접촉이 있어 왔을 뿐이었다.
또 양국정부간의 정식거래를 장개석 정부가 회피하고 대신 중국국민당과 한국 독립당이 양 정부간의 교섭문제를 간접적으로 취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43년10월 장개석 정부가 임시정부를 재 승인할 때까지 계속됐다.
40년 7월20일.
임시정부와 독립당 본부가 중경으로 옮겼다.
이때는 이미 왜적이 장사·광동·광서를 모두점령하고 중경도 부단히 공습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 지 장군과 시국걱정을 하다가 독립군의 후신으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나는 임시정부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중·미·영 연합군과 같이 교전국으로 참가, 우리나라 본토상륙작전을 준비하자고 제의했다. 나는 지금이 그 절호의 「찬스」라고 역설하고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혁명의 성공은 언제나 군사력에 의해 좌우되는데 종전의 만주독립군경험으로 봐서 중국중앙정부의 이해와 원조가 그 어느때보다도 적극적일 것이라는 판단과, 둘째는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패할 것이 확실시되는 만큼 교전단체로 참전을 해야 한다는 점, 세째는 군사행동을 함으로써 국내외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점등이었다.
내 말에 대해 지 장군도 즉각 찬성을 표했다. 이어 지 장군과 나는 군대편성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협의했다.
우리는 우선 협의대상자로 독립당이나 임시정부안에서 대 중국외교에 있어 주역을 담당하고있는 박남파(찬익)옹을 지목했다.
박옹은 당시 중국중요기관과 각계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백범과 장개석 장군 사이를 접근케 하는데도 큰 힘을 발휘하던 인물이었다.
우리는 남파와 함께 의논하여 합의를 본 후 백범을 설득키로 했다.
우리의 얘기를 들은 남파옹은 즉석에서 찬의를 표하며 중국당국자를 설득하는데는·격동책을 써야한다고 그의 의견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지금 중국정부의 외무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서은증인데 그는 원래 우리 일을 돕는데 열성적이요 이 사람에게 백범 등 동지 몇명이 도미하려한다고 하고 여행권을 몇장 신청하면 반드시 그가 도미목적과 이유를 물을 것이요, 그때 우리는 도미목적이 독립운동자금을 미 정부에 청구한다고 밝히고 이를 미국에 요구하는 이유는 현재 중국이 수년에 걸친 전쟁으로 곤경을 겪고있어 한국독립운동의 비용까지 청구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실명하면 반드시 서씨가 우리의 도미를 만류하면서 무슨 새 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을 들먹여 중국당국에 충격을 주는 격동법의 요지였다.
우리는 이 방법을 채택키로 하고 백범을 찾았다. 우리의 계획을 소상히 듣고 난 백범은 즉석에서 찬의를 표시했다.
백범은 『과거에도 광복군을 국군의 기초로 창설하여 만주에 두고 왜적과 싸우려했으나 여러가지 여건으로 결국 유명무실하게 돼버린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면서 『우리의 계획대로 중국당국과 교섭하여 군사운동을 하게되면 그때와는 다른 환경인 만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백범은 『백산(지 장군)·백강(나) 두 사람이 과거 만주에서 군사운동을 한 경험이 있으니 군대가 발족되면 모든 책임을 지고 맡아달라』면서 『이같은 구상을 한데대해 퍽 감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백범의 허락을 받은 나와 지 장군은 이날부터 밤을 새워 「광복군계획서」를 기초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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