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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노이로제」…몸사려 눈치 살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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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정쇄신의 회오리가 두 달째 계속되고 있는 관가에는 급행료 등 외면적인 부조리가 전에 비해 훨씬 움츠러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업무처리의 지연, 공무원의 사기저하 등 새로운 형태의 부작용이 눈에 띄고 있다. 각급 부처마다 제나름의 색다른 구호와 방안을 내걸고 부조리제거 「캠페인」에 나섰던 공무원들은 잇따라 덮치는 감사반의 내습과 곳곳에서 터지는 비위사건으로 초긴장상태. 일부 대민부처에서는 아직도 서정쇄신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치 못한 채 지나치게 눈치만 살피느라고 업무처리가 늦어지고 여비의 변태지출 중단으로 실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못마땅한 표정들.
서정쇄신 작업 이후 부처마다 가장 크게 두드러진 현상은 공무원들의 눈치작전.
대부분의 부처에서는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서로 맡지 않으려고 몸 사리기 일변도.

<바깥바람 못쐐 두통>
건설부의 모 국장은 국회의원으로부터 지역구의 정부지원사업을 협의하기 위해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자 장관실로 달려가 재가를 받고서야 겨우 응낙했고, 재무부에서는 모든 직원이 외부면회인사가 올 때마다 국장의 승인을 받고서야 만나기도.
정부종합청사의 공무원들 가운데는 점심시간에 청사 밖 출입을 하면 외식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지레걱정, 자리를 뜨지 않고 있어 가뜩이나 공기가 탁한 청사에서 바람을 쐴 수 없어 두통을 앓는 직원이 늘어나기도. 또 구내식당에서 매식을 하는 직원들은 식당의 식사량이 적어 하오 4시쯤이면 다시 식당으로가 분식을 사먹는 직원들이 부쩍 늘었다.
서울시의 경우 가뜩이나 관광운수국 부정사건이 들통나 「버스」증차를 하면서 업자들의 불평을 해소하고 필요 없는 오해를 사지 않겠다는 속셈에서 각 운수회사별로 「나눠주기식」으로 1∼3대씩을 골고루 배정. 이 때문에 교통 혼잡도나 노선별 특수사정이 무시돼 1백49대의 「버스」가 증차됐어도 교통난 해소에는 큰 도음이 안됐다는 것. 이밖에 매연차량 등 단속직원들의 지나친 몸조심으로 교통질서가 크게 문란해진 것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우울한 말단공무원>
보건직 공무원들의 부정을 막는다는 이유로 식품 및 환경위생업소에 대한 위생감사를 위생협회의 자율규제에 맡기면서 「바」·「카바레」의 퇴폐풍조, 업태위반, 영업시간위반 등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기도 한다고 했다.
부조리제거 작업이 추진되면서 가장 우울해진 것은 말단공무원들. 내무부의 L주사는 『매달 2만∼3만원씩 타먹던 여비가 실비 밖에 지급되지 않는다면 1년에 3백%의 「보너스」를 타도 실수입은 줄어든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공부의 K주사는 『서정쇄신 한다면서 말단만 들볶지 말고 독과점 업체에 대한 특혜 등 장관급에서 이루어지는 원천적이며 권력형 부조리와 원가계산 등에서 업자를 두둔하는 중간 관리층의 지능적인 부조리의 추방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위공무원들 중에도 불평은 없지 않다.

<업자 두둔 없어져야>
중앙부처의 모 국장은 월급 9만8천3백20원에서 세금과 공제금을 빼면 수령액은 고작 6만8천원이라면서 『부수입 없이 이 돈으로 중앙관서의 국장노릇하고 집안살림을 꾸려나가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처우개선으로 생활보장이 되지 않고 기본적으로 검소한 사회기풍과 가치관확립이 없는 한 부조리제거는 여전히 일시적인 전시효과나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게 많은 공무원들의 중론.

<코피대신 엽차로>
부수입의 가능성이 배제되면서 이른바 좋은 자리에 대한 개념도 변모하기 시작한 듯. 모 과장은 잇따른 비위사고에 겁을 먹은 나머지 『승진 안해도 좋으니 조용한 부서로 보내달라』고 국장에게 간청, 한직으로 옮겨 앉기도 했다. 문교부의 모 국장은 오히려 한직이 다행이라는 듯 독서삼매경. 지방공무원들 가운데는 이제까지 누구도 가기를 꺼렸던 교육연수원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연수원에는 직급에 따라 월3∼4만원씩의 연구수당이 지급되기 때문. 부조리 추방작업 이후 공무원들의 「구두쇠정신」도 더욱 철저해졌다.

<운전 배우는 국장들>
대부분의 부처 장·차관실을 비롯, 국·과장실에는 접대용 「코피」가 자취를 감추고 옥수수차와 엽차가 대용품으로 등장.
K차관은 담배를 50원짜리 「명승」으로 바꾸고 내방객에게도 이 담배를 권해 마치 엄살(?)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공부의 국장들 사이에는 차량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늘어났고 시간외 근무수당이 줄어들자 직원들은 야근·휴일근무 등의 현상이 없어지고 있다.
검찰에서는 『직원 상호간의 청탁도 엄금한다』고 지시, 입회서기들은 『점심도 못 얻어먹게 됐다』고 투덜대기도.
농수산부의 경우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업무와 관련, 금품을 받을 때는 법에 따라 처단한다』는 장관명의의 계곳장이 복도에 나붙자 방문객수가 전에 비해 80%나 줄어들어 한산한 느낌.
국세청에서는 법인조사반원에 월 6만∼8만원의 생활보조금까지 지급, 업체조사활동 중 「코피」·점심식사대접 등을 일체 못 받게 지시, 점심시간이 되면 기업체 근처 다방 등에서 기다리다 출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라진 경조부조>
서정쇄신을 「원칙엄수」로만 해석하고 있는 일부부처에서는 상관이나 부하직원의 경조사에 부조하는 것까지 눈치를 보는 바람에 봄철 결혼「시즌」을 맞고도 부조하는 사례마저 사라지고 말았다(내무부의 경우).
두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잦은 감사와 비위암행감사에 신경관민이 된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도에 넘은 지시와 몸조심 때문에 『관공서에서 인정을 찾기 힘들고 개인주의만 팽배해졌다』면서 신변에 위험을 느끼지 않고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조성이 아쉽고 제도적인 관기확립이 급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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