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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핵 겨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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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29면

중국의 스모그가 재앙 수준이다. 이웃나라인 한국도 중국발 미세먼지로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현지에선 오죽할까 싶다. 스모그는 환경과 건강 분야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최근 중국 농업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스모그가 계속되면 ‘핵 겨울’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핵 겨울이란 핵전쟁이 벌어지면 핵 먼지가 하늘을 가리는 바람에 햇빛이 충분히 지상에 닿지 못해 한동안 겨울 같은 계절만 계속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농작물 생산이 줄어 식량난이 벌어지며 생태계도 교란돼 인류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SCMP는 중국의 경우 조사 결과 스모그 때문에 농작물 생장에 필수적인 광합성이 이미 방해받고 있다고 전했다. 실험실에서 완전한 묘목으로 자라는 데 20일쯤 걸리는 고추와 토마토가 베이징의 온실에선 싹이 트는 데만 두 달이 걸렸을 정도라고 한다. 완전한 묘목이 되려면 정상기간의 네 배가 넘는 3~4개월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됐다. 이게 거대한 변화의 작은 징조인지, 일시적인 현상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스모그로 자연이 몸살을 앓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실제로 있었다.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에 따른 스모그가 아니라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류가 관측한 첫 사례는 1815년 4월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 폭발이다. 당시 화산재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의 하늘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놓았다. 하늘을 가린 화산재 때문에 일조량이 확 줄어 지구 평균온도를 0.7도 낮췄다고 한다. 이듬해 서유럽과 북미는 이른바 ‘여름 없는 한 해’를 맞았다. 알곡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흉년을 맞았고 주민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1883년 8월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은 규모 면에서 최대다. 하늘 높이 올라간 화산재와 먼지는 고공의 기류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이 때문에 이듬해 북반구 평균 기온이 1.2도나 떨어졌다고 한다. 기온은 1888년이 돼서야 평년 수준을 회복했을 정도다. 5년간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영어 참고서에 예문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It seldom rains in southern California)’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로 건조한 남부 캘리포니아는 유례없는 물 폭탄을 만났다. 1883년 7월부터 1984년 6월까지 1년간 로스앤젤레스에는 969.8㎜, 샌디에이고에는 659.6㎜의 강우를 기록했다. 현지 주민들은 그해를 ‘물의 한 해’라고 불렀다.

이런 기상재해는 인간의 마음에도 상처를 줘 음울한 세기말 문화 탄생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화산 먼지는 빛을 굴절시켜 석양 무렵 서쪽 하늘을 괴기스러운 핏빛으로 물들였다. 노르웨이 상징파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1893년 작 ‘절규’의 배경에 등장하는 섬뜩한 핏빛 석양이 바로 그것으로 분석된다. 화가는 실제 이런 하늘에 대한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작품의 원제도 ‘자연의 절규’였다고 한다. 화산재로 인한 광선 굴절은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유럽 하늘의 달빛에 푸른 기운을 띠게 했다. 블루스, 즉 우울의 시대는 여기서 온 게 아닐까. 낮에는 하늘을 덮은 미세한 화산 먼지 때문에 태양 주변에 ‘비숍의 링’이라는 음울한 고리가 생겼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온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온통 부옇게 하는 스모그와 미세먼지가 자연과 인간에 어떤 연쇄반응을 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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