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탄신 백주 특별 기고|로버트·올리버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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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5년12월17일 나는 「프란체스카」여사로부터 고마운 편지를 받았다. 『이 박사는 「올리버」 박사에게 교육 관계 고문이나 다른 적당한 공직을 마련해 달라고 우리들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하지」 장군에게 부탁했다』고 쓰고 한국까지 올 비행기 요금과 급료 문제 같은 데도 신경을 써주었다.
이때만 해도 이 박사는 「하지」 장군을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던 것이다.

<신탁 통치 문제로 「하지」와 틈>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서울에서 열린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안이 논의되면서부터 냉각되기 시작했다.
사실 신탁 통치 문제는 이 박사의 반대만 아니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좌우 합작 정부 수립 계획을 수락하는 김규식·여운형은 「점잖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지만 이 박사의 반대는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박사는 「하지」에게 『이 나라는 우리 나라란 말이오. 당신네 미국은 한국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물러가는 일밖에 할 짓이 없소. 신탁 통치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버텼다.
46년6월 「하지」는 나를 한국에 오도록 초청했다. 몇몇 선교사와 정부에 고용된 미국인을 제하면 내가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하지」는 수 인사를 하고 나서 대뜸『우리는 당신이 이 박사의 낡아빠진 옹고집을 일깨우라고 데려온 거요. 그가 위대한 정치가이긴 하지만 공산주의자와 협력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그는 한국 정부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내 처지는 아주 묘하게 된 셈이었다. 이 박사가 자기 일을 도움 받기 위해 나의 초청을 요청했던 것인데 막상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하지」로부터 말하자면 회유 특사」 노릇을 부탁 받았으니 말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늙어빠진 바보 이승만 때문에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을 당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의 발표에 따라 46년12월12일 남조선과도 입법 의원이 발족, 김규식이 의장으로 선출되자 기왕에 조선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이끌어 왔던 이 박사와 「하지」간의 협조는 결정적으로 깨지게 됐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 계획을 포기하고 47년9월17일 「유엔」에 한국 문제를 제소했고 이듬해 5월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에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

<정전 회담도 끈질기게 반대>
이 박사의 고집은 6·25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의 일인데 한번은「무초」주 한미 대사가 이 박사에게 『공산군이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니 임시 수도를 제주도로 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고했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주머니에서 권총을 내보이며『남한이 모두 점령되면 「프란체스카」와 함께 자살하겠다』고 했다. 「맥아더」 장군이 수원 비행장에 내렸을 때는 『장군 조심하시오. 볏 포기가 군화 밑에 깔렸소』라고 그 다운「유머」를 보인 적도 있다
판문점 정전 회담에 관한 이 박사의 반대는 끈질겼다. 그는 ①중공군의 즉각 철수 ②인민군의 무장 해제 ③「유엔」은 북괴에 대한 제3세력의 군사 및 재정적 지원 금지를 보장할 것 ④한국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에 한국이 참가할 것 ⑤한국은 그 주권과 영토에 관한 희생이 따르는 어떠한 협정도 거부한다고 맞섰다. 끝내는 2만7천여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역시 이 박사다운 처사였다.
미국은 이에 한국군에 단 사흘치의 「개설린」과 탄약만 보급하는 조치를 취했다. 정전 협정이 조인된 직후 「존·포스터·덜레스」 국무장관이 이 박사를 회유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 나도 참석했지만 이 박사는 『당신의 방문 목적이 이미 결정된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보로 할 수 있었다』고 힐책했다. 1954년4월 「제네바」에서 열린 정전 협정에 따른 정치 회담에서 나는 12명의 「업저버」단을 이끈 변영태 외무장관의 고문으로 일했다. 공산 측은 「미국의 꼭둑각시인 이승만과 모든 외국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 회의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미국과 「유엔」측은 「이 박사의 사직, 한국 정부의 해산, 전 한국에 총선거 실시」를 대안으로 나에게 이 박사를 설득하라고 요청했다. 미국 측은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공산 측에서 거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 조치로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자는 속셈이었다.
변 장관과 나는 장문의 암호 전문을 이 박사에게 발송했다. 이 박사는 곧 우리를 소환했다. 내가 경무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먼저 들어갔던 하 장관이 나와 『해임되었소』하면서 밖으로 나 갔다. 깜짝 놀란 나는 집무실에 들어가 대뜸 『나도 사직하겠읍니다』고하자 이 박사는 얘기나 하자면서 나를 자리에 앉혔다. 내가 계속 항의하자 그는 『하 장관은 한국의 외무장관으로서 정부 정책을 충실히 이행할 책임이 있소. 당신은 고문으로서 직책을 수행했을 뿐이오. 자 함께 계속 일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행정가로서는 낙제생>
내가 보기에는 행정가로서의 그는 낙제생인 것 같다. 중요한 국사를 내각에서 결정하기 보다는 독단적으로 결정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한 독선이 한국에 많은 부작용을 낳게 한 것도 사실이다. 또 그의 결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반대파를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려는 편협성이다. 「반정부·반 이승만」은 곧 「친공」으로 몰려 억압받았다. 뿐만 아니라 심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인플레」속에 노동자의 3분의 1이 실업 했고 전 인구의 75%에 이르는 농민이 비참할 정도로 허덕였고 공업·광업·수산업도 보 잘 것 없었다.
그러나 교육의 확충, 농지 개혁의 효과, 국민도의의 앙양, 탁월한 외교 등의 문제에서는 이 박사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박사의 일생은 그 자신을 위했다기보다는 한 국민을 위해 바쳐졌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 분단 한국의 통일, 공산주의와의 타결로 일관해 온 그는 그의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의 한사람으로 손꼽히게 하는 것이다.

<차례>
①로버트·T·올리버 박사 (상) (중) (하)
④존·무초 전 주한 대사
⑤마크·클라크 장군
⑥매듀·리지웨이 장군 앨릭·버크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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